혁신 경영? 디자이너의 눈으로 보라

  • 입력 2007년 5월 26일 02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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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G는 오랫동안 어린이 칫솔을 ‘작은 어른용 칫솔’처럼 만들어 왔다. 한 디자인 업체가 1990년대 말 오랄B 칫솔의 제품 개선을 의뢰받았다. 이 업체가 한 일은? 디자이너들은 꼬마 사용자들의 집을 방문했다. 이들은 어린이들이 손가락이 아닌 손바닥 전체로 손잡이를 잡고 양치질을 하는 걸 발견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들은 끈끈한 고무를 사용해 손잡이를 굵게 만들었다. 고객 관찰을 통해 통념을 뒤엎은 결과 판매는 2배 이상 늘어났다. 디자인업계에선 전설처럼 내려오는, 혁신디자인의 선두주자 IDEO(아이디오)의 성공사례 중 하나다. 17, 18일 미국 시카고에서 일리노이공대(IIT) 디자인연구소가 주최한 디자인 전략 콘퍼런스의 화두는 ‘기업의 성공을 고객탐구에 건다’였다.》

첫 연설자로 나온 짐 해킷 스틸케이스 대표는 이를 ‘디자인 사고(design thinking)’라고 불렀다. 단순히 제품의 겉모습을 예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제품을 고객에게 최적화하는 것이 디자인이라는 뜻이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기업들은 고객을 찾는다. 그러나 “이 제품을 써 보니 어떤가”라고 묻는 정도에 그쳐선 안 된다. 자택을 찾아가 몇 시간씩 질문한 뒤 냉장고를 열어 보거나, 스토커처럼 만 48시간 동행하면서 조깅 또는 쇼핑에 나선 고객을 관찰한다. 통상적으로 기업이 해 온 집중 그룹(focus group) 인터뷰와 달리 고객의 긴장을 풀어 준 채 진짜 속내를 살핀다. 뉴욕타임스는 이런 기법을 긴장풀기(unfocused) 인터뷰라고 불렀다.

경제주간지 비즈니스위크는 몇 년 전부터 ‘디자인과 이노베이션’ 담당 팀을 별도로 떼어 내 전문 인력 6명을 전담 배치했다. 경영자의 관심이 디자인을 통한 혁신으로 옮아가고 있다는 증거다.

이날 발표자로 나선 홍범식 SK텔레콤 상무는 “고객이 ‘이렇게 바꿔 달라’고 해법을 제시한다면 이미 한발 늦었는지 모른다. 고객의 삶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봄으로써 고객도 모르는 욕구(needs)를 찾아내는 능력에 성패가 달렸다”고 말했다.

시카고 도심의 현대미술관(MCA)에서 열린 세미나에는 덴마크 고객조사기관 ‘레드 어소시에이츠’의 컨설턴트 준 리 씨도 참관했다. 이틀간 열리는 행사의 참가비는 2000달러가 넘는다. 그는 무엇을 얻기 위해 대서양을 가로질러 왔을까.

그는 인터뷰에서 “고객의 집에 꼬박 이틀을 머물러 봤다. 책상머리에서 고민할 때와 180도 다른 소비자의 세상이 있었고, 그곳에 치열한 현장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런 기류 속에서 기업들은 다양한 전문가를 뒤섞는 통섭(統攝·여러 분야를 넘나듦)의 팀 구성이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고 믿는다. 심리학 인류학 전공자를 앞 다퉈 채용한다. 디자인대학원을 졸업했다는 준 리 씨도 학부 전공은 신경생물학이었다.

사업의 미래를 고객에게서 찾으려 할 때 가장 주목해야 할 대상은? 바로 ‘괴짜 고객’이다. 이들은 예전에 “정상적인 다수 고객과 다르다”는 이유로 기업의 관심을 못 끌었다. 홍 상무는 “입맛을 위해 유기농 작물 재배에 손수 나서고, 연장을 스스로 만들며 기업이 깨닫지 못한 스스로의 욕구를 풀어 가는 이들 괴짜야말로 신사업 아이디어의 보고(寶庫)”라고 말했다.

둘째 날 가장 주목받은 연사는 괴짜의 부상(浮上)에 주목해 ‘롱 테일 이론’을 제시함으로써 인터넷 시대의 패러다임 변화를 예고한 크리스 앤더슨 씨였다.

정보기술(IT) 분야 최대 판매부수 월간지 와이어드(WIRED)의 편집장인 그는 “과거에 주목받지 못했던, 소수를 위한 ‘작은 사업’ 개척에 기업들이 달려든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디자인 사고’가 늘 성공만 가져온다고 믿어서는 진정한 결실을 맛보지 못할 수도 있다. 시카고의 디자인기업 도블린(Doblin)의 래리 킬리 대표는 “진짜 혁신은 뭔가 최종 결과물을 찾아내는 유레카(Eureka)의 순간이 아니라 ‘이거 낭패군’ 하며 새로운 시도와 실패를 거듭하는 과정에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그는 “100번의 혁신 디자인 시도 가운데 95번은 실패할 수 있다는 자세로 일한다”고 덧붙였다.

이번 디자인 전략 콘퍼런스에는 한국기업으로는 SK텔레콤과 삼성전자가 참석했다.

시카고=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롱 테일(Long Tail)

평균치와 거리가 먼 ‘극단적 현상’을 말하는 통계 용어. 대형 오프라인 서점에선 공간 부족으로 매장에 배치되지 않고 절판된 책이 인터넷 서점 아마존닷컴에선 매년 20∼30권씩은 꾸준히 팔리는 현상에 착안해 이론화됐다. 인터넷 경제의 탄생으로 고객의 검색비용과 기업의 보관비용이 제로(0)에 가까워짐에 따라 소수에게만 선호되면서 잊혔던 상품군(群)이 되살아났다. 그림에서 오른쪽 빗금 친 영역은 소량 판매되지만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0%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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