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생들의 대학생활]첫눈에 찍어 미련없이 삭제…‘디카연애’

  • 입력 2007년 5월 26일 02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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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교 시절 이미 한두 번의 연애를 경험한 요즘 대학생들은 각자가 모두 ‘연애 전문가’다. 50∼100일이면 만남에서 사랑 그리고 이별까지 속전속결. 이들 ‘젊은 팔공(1980년대생 대학생)’의 연애는 손쉽게 찍었다가 지우는 ‘디카 연애’다. 25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연세대 교정 벤치에 앉아 있는 남녀 학생. 홍진환  기자
중고교 시절 이미 한두 번의 연애를 경험한 요즘 대학생들은 각자가 모두 ‘연애 전문가’다. 50∼100일이면 만남에서 사랑 그리고 이별까지 속전속결. 이들 ‘젊은 팔공(1980년대생 대학생)’의 연애는 손쉽게 찍었다가 지우는 ‘디카 연애’다. 25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연세대 교정 벤치에 앉아 있는 남녀 학생. 홍진환 기자
《# 4월 서울 신촌의 한 맥줏집. 미팅 나온 대학생 남녀 8명이 마주 앉아 인사를 나눴다. 남학생 B(21) 씨가 술잔을 돌리며 “우리 왕(王)게임 할까” 하고 말을 꺼냈다. ‘왕게임’은 왕으로 뽑힌 사람이 시키는 일을 해야 하는 게임. 미팅에서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흔히 하는 놀이. 못하면 벌주를 마시게 된다. 제비뽑기로 왕이 된 남학생이 “3번, 5번 키스”를 명령했다. 3번 여학생과 5번 남학생은 다소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입을 맞췄다. 박수와 함께 다시 게임은 진행됐다. 단체미팅을 나가 허겁지겁 짝을 정하고 서로 고향이 어디인지, 형제는 몇인지 ‘호구조사’에 들어가던 모습은 사라졌다. “미팅은 ‘오늘 한번 즐겨 보자’는 것, 한마디로 엔조이예요. 마음에 드는 이성을 만났다면 덤이라고 생각해야지 여자친구를 만들 작정으로 나온다면 바보죠.”(B 씨).》

■ 쿨하게 만나고 쿨하게 헤어진다

연세대생 A(24·여) 씨는 대학에 입학한 뒤 사귄 남자친구가 10명이 넘는다. 데이트 친구(Datemate)도 5명 정도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남자친구를 사귄 뒤 지금까지 ‘연애 공백기’를 한 달 이상 가져 본 적이 없다. 이 가운데 3분의 1은 연애 기간이 50일을 채 넘지 않았다.

A 씨는 사람을 사귈 때 망설이지 않는다. 동호회 등에서 ‘괜찮다’ 싶으면 바로 연애 모드로 돌입한다.

“결혼 상대 고르는 것도 아닌데 사귀면서 알아가고 안 맞으면 관두면 되는 것 아니에요?”

‘젊은 팔공’들은 연애나 미팅, 이성에 대한 환상이 적다. 절반 가까이는 중고교 시절 이미 이성과 사귄 경험이 있다. 각자가 모두 ‘연애 전문가’라고 생각한다. 진도도 빠르다. 50∼100일이면 만남에서 사랑 그리고 이별까지 모두 겪는 것은 다반사다.

○ 찍었다 지웠다. ‘디카 연애’

“걔, 싸이 주소가 뭐야?”

충남대생 김모(22·여) 씨는 최근 소개팅을 제안받자마자 주선자에게 물었다. 싸이월드 미니홈피에서 상대방의 외모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미니홈피를 통해 외모나 성격, 친분관계를 확인한 뒤 소개팅을 할지 말지 결정하죠. 친구 미니홈피를 보다가 맘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소개도 부탁해요.”

경희대생 이모(24) 씨는 얼마 전 술자리를 함께한 친구의 친구에게 하루 만에 “사귀자”는 문자를 보냈다. 하지만 거절당하자 더는 연락하지 않았다. 거절하는데 달라붙으면 ‘쿨’ 하지 않은 것이다.

이 씨는 “캠퍼스나 지하철 2호선 강남역 인근에서 헌팅해 3일 만에 사귀기 시작하다가 100일이 못 돼 헤어지는 경우를 많이 본다”며 “얼마 동안 사귀었나보다 몇 명을 사귀어 봤나가 연애 관록에서는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고 말했다.

한 학년 정원이 40명에 불과한 학과에서 동기끼리 사귀다 헤어진 뒤 각각 다른 동기나 선후배와 또 커플이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서울대 석사과정생인 박모(28) 씨는 “내가 학부생일 때만 해도 ‘아는 사람들끼리 의리가 있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말했지만 04, 05학번 정도부터는 당사자들이 신경을 안 쓰는 것 같다”고 말했다.

요즘 대학생의 연애는 손쉽게 찍었다 지우는 ‘디카(디지털카메라) 연애’다.

취업사이트 파워잡이 지난해 3월 대학생 423명에게 연애관을 물은 결과 평균 연애 기간은 ‘100일’(29.4%)이 가장 많았다. 이어 ‘1년’(22.4%), ‘한 달’(12.4%) 순이었다. 첫 키스 시점은 사귄 지 ‘1주일’(33.4%), ‘한 달 이내’(30.2%) 등이 다수였다. ‘당일’이라는 응답도 9.4%나 됐다.

잊는 것도 빠르다. 실연 극복 평균 기간은 ‘한 달’(20.5%)을 꼽는 이가 가장 많았고 ‘일주일’(11.2%)도 적지 않았다.

올해 2월 대학을 졸업한 지용준(27) 씨는 “애인 사이에 문제나 충돌이 생기면 참고 넘어가거나 풀기보다 연애 관계를 깨 버리는 쪽을 택한다”고 말했다.

○ 거리 조절도 내 맘대로

숭실대 4학년 이모(22·여) 씨는 일주일에 2, 3번씩 만나는 데이트 친구가 있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도 함께 보냈다. 손을 잡거나 키스 등의 가벼운 스킨십도 한다.

하지만 ‘사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각자 애인이 생겨도 간섭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의 연애 관계에 대해 스스럼없이 털어놓고 조언도 구한다.

“데이트 친구는 동시에 다른 이성을 만나도 질투하지 않는 게 원칙이에요. 감정이 식으면 자연히 연락이 뜸해지는 순서를 밟죠.”(이 씨)

애인의 정의도 여러 가지다.

매일 만나도 ‘사귀지 않는다’고 말하는 데이트 친구가 있는 반면 일 년에 서너 번 만나도 ‘죽고 못 사는 사이’인 롱디(먼 거리를 뜻하는 ‘Long Distance’의 준말) 커플도 있다.

롱디 커플은 사는 곳이 멀리 떨어져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인터넷 등의 매체를 통해 교제하는 커플. 해외 연수를 나가는 대학생이 늘면서 생겼다.

한 사립대 박사과정의 이모(29·여) 씨는 2005년 1월 미국 대학원에 유학할 때 어학연수 온 현재의 남자친구를 만났다. 사귄 지 3개월 만에 남자친구가 먼저 귀국한 뒤 이 씨는 아침저녁으로 하루에 4시간가량 웹 카메라(웹캠)를 켜 놓고 서로의 생활을 들여다봤다.

이 씨는 “2006년 5월 귀국할 때까지 1년여를 한 번도 못 봤지만 같은 공간에서 함께 지내는 커플보다 더 친밀한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 사랑도 노하우

요즘 대학생에게는 연애도 정보전이다.

23일 한 포털 사이트의 카페 ‘○○대에 좋아하는 사람 있다면’에 “오늘 낮 12시 45분경 인문관 앞을 지나간, 키 162cm 정도의 파란색 반팔에 흰색 긴팔티를 레이어드로 입은 여학생을 알려 달라”는 이 학교 남학생의 글이 올라왔다.

순식간에 “△△△다”, “포기하라. 잘 어울리는 멋진 남자친구가 있다”, “밀어붙여라. 용기 있는 자만이 미인을 얻는다” 등의 댓글이 올라왔다. 신원 확인이 되면 어떻게 접근할지 생생한 조언도 잇따른다.

포털 사이트 ‘다음’에만 ‘○○대에 좋아하는 사람 있다면’이란 이름으로 개설된 각 대학의 카페가 140여 개. 손자의 지피지기(知彼知己)의 가르침을 연애 전선에서 실천하는 것.

연애도 아는 만큼 보인다. 연애와 사랑을 일찍 경험한 요즘 대학생이 궁금해 하는 건 사랑의 기술(skill)이다.

학생들의 성공적인 연애를 돕는 강의과목도 개설됐다. ‘인간관계학’의 일부분이다.

서울 시내 대학 가운데 절반 이상이 ‘성과 인간관계’(연세대), ‘사랑학개론’ ‘성과 심리’(숙명여대), ‘사랑의 심리’(성균관대) 등 사랑과 연애학 강좌를 개설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도 올해 처음 교양 강좌로 ‘사랑학’이 개설됐다.

대학 학생상담센터 등에는 커플의 고민을 나누거나 성공적인 데이트, 스킨십 비법을 가르쳐 주는 프로그램도 생겨났다.

이번 학기에 처음으로 커플 의사소통 향상 프로그램인 ‘커플 클리닉’을 마련한 숭실대 학생생활상담소의 김지혜 조교는 “학생들이 연애 경험이 많다 보니 요즘 관심사는 서로에게 효과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기술”이라고 설명했다.

홍수영 기자 gaea@donga.com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

■ 反트렌드가 트렌드!

《#1 미술관이나 전시회는 반드시 혼자 간다. 왜냐하면 나만의 영역은 단짝 친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2 강의실에서 같은 티셔츠를 입은 사람을 보고 다시 마주칠까봐 그 길로 캠퍼스를 나왔다. 왜냐하면 똑같이 유행을 따르는 것처럼 보여 너무 창피하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한성대 2학년 신인아(20·여) 씨. 학과 술자리라면 빠지는 일이 없지만 철칙이 하나 있다. 미술관이나 전시회는 반드시 혼자 간다.

속 깊은 얘기까지 나누는 친구가 “이 전시회 괜찮다. 함께 가자”고 해도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 대신 “각자 다녀와서 함께 얘기해 보자”고 말한다.

신 씨는 “우리 세대는 영화든 음악이든 춤이든 자기만의 영역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며 “이런 영역은 단짝 친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대학생들은 유행에 민감했다.

1994년 힙합 패션이 유행했을 때는 캠퍼스에 헐렁한 바지가 물결을 이뤘다. 1997년 ‘이스트팩’(미국 브랜드의 백팩)이 붐을 일으켰을 때 열의 여덟은 이스트팩을 샀다. 1999년 영화 ‘쉬리’가 개봉했을 때 대학생들은 우르르 영화관으로 몰렸다.

하지만 최근 캠퍼스는 ‘반(反)트렌드족’이 주도한다. 남들에게 휩쓸리기를 거부하면서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는 이들이다.

이들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나 자신, 나만의 그 무엇이다. 집단의 자아에 매몰되지 않은 자아 정체성을 가진 젊은이가 많아진 것.

반트렌드족의 경우 남미 음악 등 소수 문화를 즐기며 일부러 외톨이가 되기를 자처하기도 한다. 지난해 건국대를 졸업한 김태훈(28) 씨는 인기 드라마는 보지 않는다. 시청률이 30%에 육박한 화제 드라마 얘기를 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소외돼도 신경 쓰지 않는다. 대신 김 씨는 미국 드라마(미드), 그것도 스릴러만 수십 편을 봤다. 인터넷 동호회 회원들과는 최신 스릴러 미드에 대해 몇 시간씩 전문가처럼 분석한다.

김 씨는 “드라마에 대한 취향 차이도 있지만 남들과는 다른 나만이 즐길 수 있는 것을 만든다는 사실이 더 짜릿하다”고 말했다.

패션기사나 패션잡지를 즐겨 보고, 주위 사람들이 무슨 옷을 입는지 눈여겨보지만 ‘똑같은 것’은 싫어한다.

홍익대 한모(22·여) 씨는 최근 수업을 들으러 갔다가 같은 티셔츠를 입은 사람을 발견하고는 얼른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다시 마주칠까봐 아예 그 길로 캠퍼스를 벗어났다.

“유행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는 일은 너무 창피해요. 남들 다 입는 짧은 청치마를 입더라도 어떻게 다르게 보일지 끊임없이 고민하죠.”(한 씨)

이 때문에 캠퍼스에는 유행 시기를 달리하는 여러 ‘룩’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난다.

제일기획이 지난해 13∼59세 3500명을 대상으로 한 라이프스타일 조사에서도 19∼24세 666명 가운데 48%가 “두드러지는 옷이라도 마음에 들면 입는다”고 답했다. 13∼18세(43%), 25∼29세(41%) 등 인접 연령대와 비교해 볼 때 가장 높은 응답률이었다.

LG애드 김연진 부장은 “미니홈피나 블로그처럼 자기를 표현하는 디지털 수단들이 등장하면서 요즘 대학생들은 잘 알려지지 않은 음식이나 패션, 문화도 일부러 찾아 소비하는 등 자신을 타인과 차별화하는 데서 정체성을 확인한다”고 말했다.

홍수영 기자 gae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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