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탕 브리핑’ 어느 정도이기에…

  • 입력 2007년 5월 25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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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취재기자들의 비서실 출입이 아예 막혀 있어 매일 오후 2시 열리는 대변인 정례브리핑이 유일한 공식 창구인 청와대. 21일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이 전격 사의를 표명했을 때 청와대는 브리핑에서 “실무선에선 전혀 몰랐다”고 잡아뗐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과 유 장관이 전날 만나 사퇴 여부를 조율했다는 소식이 정치권에서 흘러나온 뒤 청와대는 마지못해 이 사실을 시인했다. 기자들은 “이럴 바에야 브리핑을 뭐 하러 하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지난해 유진룡 전 문화관광부 차관의 사퇴 외압 시비가 불거졌을 때는 외압의 당사자로 지목됐던 이백만 당시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과 양정철 홍보기획비서관은 아예 브리핑 자체를 거부했다.

#2 지난달 30일 정부과천청사 휴게실에서는 노동부 근로기준국장의 브리핑이 있었다. 브리핑 내용은 5월 1일 근로자의 날이 유급휴일이라는 내용. 근로자의 날은 1963년부터 40년 넘게 유급휴일이었는데 이를 새삼스레 알리기 위해 브리핑까지 한 것인지 의아해하는 기자들에게 노동부 관계자는 “매달 국정홍보처에 보고해야 하는 브리핑 실적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브리핑 직전 책3권 자료 나눠주고 “질문하시죠”

“대통령이 TV로 보는데”… 공무원이 자리 채워

정부는 공무원 취재 접근을 제한하면서 2003년 도입한 각 부처의 ‘개방형 브리핑제’를 통해 언론에 충분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실제 브리핑 현장을 들여다보면 이런 주장은 사실과 동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KTV 촬영용 브리핑?

정부과천청사 등에 마련된 브리핑룸에서 각 부처가 자주 실시하는 브리핑에 참석하는 기자들은 많아야 4, 5명 수준이다. 브리핑 내용이 ‘맹탕’이기 때문. 브리핑이 진행되는 동안 대개 공무원들이 기자석에 앉아 자리를 채운다. 노 대통령이 즐겨 본다는 한국정책방송(KTV)이 대부분의 브리핑을 녹화 중계하는 것을 의식한 탓이다. 뒤에서 촬영이 이뤄지기 때문에 뒤통수만 보이는 사람이 기자인지 공무원인지 알아볼 방법은 없다.

매년 말이면 각 부처 차관 이상 고위 관료들의 브리핑이 부쩍 늘어난다. 지난해 말 한 경제 부처 고위 공무원은 “부하 직원들이 ‘연말이라 국정홍보처에 올릴 실적이 부족하다’고 재촉해 나왔다”며 “차관 이상이 브리핑하면 더 높은 점수를 받는다”고 털어놨다. 이러한 실적 채우기를 위해 브리핑룸도 아닌 휴게실에서 몇 마디 말로 브리핑이 끝나기도 한다. 올해 노동부가 실시한 브리핑 39건 가운데 24건이 ‘약식’으로 실시됐다.

○민감한 내용은 ‘모르쇠’, 자료폭탄도

국방부는 이달 초 공군 KF-16 전투기의 정비 불량 파문 관련 감사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었지만 갑자기 발표할 내용이 없다며 브리핑 계획을 취소했다. 대당 400억 원이 넘는 전투기의 추락 원인이 총체적인 정비 불량으로 드러나 공군참모총장이 옷을 벗은 국민적 관심사임을 감안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태도다. “평소에는 ‘뉴스 가치’도 없는 브리핑을 기계적으로 하다가도 정작 껄끄럽거나 민감한 내용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는 기자들의 불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지난달 27일 정부과천청사 브리핑실.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의 경제적 효과 분석 결과’라는 브리핑에 앞서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등이 만든 3권짜리 보고서가 기자들에게 배포됐다. 연구진은 일방적으로 보고서를 읽었고 기자들은 내용을 확인하느라 이렇다 할 질문도 던지지 못한 채 ‘보고서 낭독’ 브리핑은 30여 분 만에 끝났다. 세부 내용을 제대로 확인해 질문할 물리적 시간이 부족하다는 기자들의 항의도 소용없었다. 기자들은 “전문가도 내용을 분석하는 데 며칠이 걸릴 자료를 받자마자 브리핑을 듣고 수시간 만에 기사를 쓰라니…”라며 어이없어했다.

“찾아가는 행자부…” 장관 개인 홍보성 자료 배포

“회의 열렸다. 합의 못봤다” 성의없는 단 두 문장

○‘백그라운드 브리핑’도 부실

각 부처는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비보도나 ‘엠바고’(언론사와 취재원이 일정 시점까지 보도를 유예하기로 합의하는 제도)를 조건으로 ‘백그라운드(배경) 브리핑’을 요청하는 사례가 많다. 18∼22일 평양에서 열리는 제13차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를 앞두고 통일부는 17일 “남북관계의 민감성과 회담을 하루 앞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 달라”며 백그라운드 브리핑을 요청했다. 카메라나 마이크를 모두 끈 채 정부 당국자의 실명 인용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브리핑을 듣고 있던 기자들은 당황했다. 그야말로 ‘맹탕’ 브리핑이었기 때문.

정부 당국자는 북한의 2·13조치 이행과 쌀 차관 지원 연계 등 핵심 내용에 대해서는 입을 닫아 버렸다. 어떤 질문을 던져도 “지금 말하기 곤란하다”는 대답이 이어지자 기자들 사이에서는 “이런 브리핑을 왜 백그라운드로 하느냐”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핵심을 비켜가는 답변이나 모호한 화법도 자주 나온다. 노 대통령이 지난해 말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외교안보 부처들과 사전협의 없이 동해를 ‘평화의 바다’로 부르자고 제안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자 외교통상부는 올해 1월 브리핑에서 “(대통령과) 대면 협의는 하지 않았지만 협의했다고 볼 수 있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설명을 했다.

○보도자료 홍수지만…

기자실 폐쇄 문제로 여론이 들끓었던 23일에도 행정자치부는 ‘평소처럼’ 7건의 보도자료를 내놨다. 행자부가 올해 들어 이달 24일까지 낸 보도자료는 무려 300여 건. 23일 나온 ‘중앙-지방 파트너십 구축을 위해 발로 뛴 4개월’이라는 보도자료는 박명재 행자부 장관이 취임 후 4개월에 걸친 전국 시도 순방을 마무리했다는 내용. 여기에는 “박 장관은 평소 ‘지방이 곧 국가이자 지방행정이 곧 국정’이라는 행정 철학을 각 시도에 전파하면서 지역의 현안 및 애로 사항을 직접 챙기는 ‘찾아가서 도와주는 행자부’를 몸소 실천…”이라는 등의 ‘자화자찬’이 많아 장관 개인의 홍보 자료를 연상시켰다.

2월 8일 한미 쇠고기수입검역기술협의회가 끝나자 기자들은 농림부 당국자들에게 전화 취재를 했으나 “내일 자료를 낼 때까지 참아 달라”는 대답만 들었다. 다음 날 농림부는 ‘약속대로’ 자료를 배포했다. 딱 두 문장이었다. “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합의를 보지 못했다”였다.

이런 경험 때문에 일선 기자들은 “보도자료의 홍수 속에서 정작 국민에게 꼭 알려야 하고 국민이 알아야 할 정보를 찾기는 쉽지 않다”고 말한다.

김기현 기자 kimkihy@donga.com

이은우 기자 libra@donga.com

윤상호 기자 ysh100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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