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호 칼럼]다음 국정 책임자의 자격 요건

  • 입력 2007년 5월 25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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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넘은 자를 믿지 말라.’ 1960년대 미국 히피족의 구호 중 하나다. ‘마흔이 넘은 자는 모조리 악당이다.’ 20세기 최고의 독설가 버나드 쇼의 희곡 대사에 나오는 말이다. 냉소적인 관찰이지만 일리 있는 말이요, 청년기 반항 문화의 기조가 되는 말이다. 서른이 넘어서 히피족의 구호를 접했지만 미온적이나마 공감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믿지 못할 악당’과 더불어 사는 것이 이 세상의 도리라고 체념하게 되었다. 경험을 쌓는다는 것은 동료 인간에 대한 기대수준을 낮추는 일이 아닌가? 낭만적 이상주의에서 깨어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악마는 나이 먹었다. 악마를 이해하기 위해선 어서 나이를 먹어라’라는 대사가 ‘파우스트’에 나오는 것이 아닌가?

1992년 가을 학기를 일본에서 보냈다. 그때 별난 뉴스를 접했다. 일본 공산당이 당 고문인 100세 노인 노사카 산조(野坂參三)를 제명했다는 내용이다. 그는 공산당 창당에 즈음해서 입당했고 1931년 코민테른에 파견되어 전쟁 종료 때까지 소련과 중국에서 활동한 투사다. 전쟁 전 가혹한 탄압을 받은 일본 공산당원은 대부분 전향했다. 극소수의 강골만이 전향을 거부하고 옥중에서 8·15를 맞았다. 흠 없는 노사카가 귀국했을 때 영웅 대접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참의원 의원과 당 중앙위 의장을 지냈다.

도덕적 순결보다 실천력이 중요

당내 권력투쟁 과정에서 그의 행적이 문제로 떠올랐다. 소련 체류 때 동지를 경찰 프락치라고 무고해서 처형당하게 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문제가 됐다. 당사자는 완강히 부인했다. 당에서 구소련으로 파견한 조사단은 무고 사실을 확인하고 돌아와 노사카를 추궁했고 그는 마침내 사실임을 자백해서 제명당했다. 대의를 위해 헌신한 ‘영웅적 혁명가’는 금세 ‘비열한 무고자’로 전락했고 심적 타격 탓인지 그 후 곧 사망했다.

이런 정치적 음화(陰畵)는 충격적이지만 한편으로 정치교육과 인간교육이 돼 주는 게 사실이다. 1987년 대선 때 야당의 두 지도자는 단일화를 이루지 못해 4파 각축전에서 패배했다. 선거 결과가 판명된 이튿날 한 지도자는 부정선거의 결과라며 결사 투쟁을 선언했고 다른 지도자도 같은 소리를 하며 선거 소송을 냈다. 민주화에 기여한 바 없지만 열망만은 공유하고 있던 터라 분노에 가까운 실망을 느꼈다. 분열된 야당이 승리하기 어려움은 주먹구구만으로도 분명했기 때문이다.

노사카 사건은 인간에 대한 과도한 기대가 얼마나 비현실적인가를 실감하게 해 주었다.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사람은 어두운 비밀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다시 관용의 필요성을 실감했다. 두 야당 지도자만이 규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다시 하게 됐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경의가 퇴색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먼 산은 아름답다. 어찌 산뿐이랴. 가까이서 보면 모든 것이 흠집이 많아 보인다. 그래서 ‘예언자는 고향에서 알아주지 않고 집사의 눈에 영웅으로 비치는 주인은 없다’는 말이 생겼다.

국정 운영의 최고 책임자에게 우리는 도덕적 순결이나 인간적 완벽성을 기대할 수 없고 기대해서도 안 된다. 지속적인 발전과 사회 갈등의 완화를 효율적으로 도모하는 확고한 구상과 실천력을 주문받는 것만으로도 벅찬 일이다. 앞으로의 국정 경영 책임자는 막스 베버의 말을 빌리면 ‘심정윤리 지향’이 아닌 ‘책임윤리 지향’의 적임자라야 할 것이다.

분열의 교훈 간과하면 자격미달

그렇다고 겪어 봐야 비로소 알게 되는 미지수에 기댈 수는 없다. 사회적 양식(良識)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행적만은 짚고 넘어 가야 한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단순 명쾌한 역사적 교훈을 간과하는 정치인은 자격 미달이다. ‘삼국지’에 나오듯 상황에 따라 자기 장수의 목을 들고 가 투항하거나 장수에게 욕설을 퍼붓는 전사도 미달이다. 언제 누구에게 총구를 겨눌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나 못 가는 땅을 마음대로 오가며 훈수나 구걸하는 정치 광대도 안 된다. 투명하지 못하고 비밀 흥정에는 한이 없기 때문이다. 현명한 선택을 위해서 국민은 지금부터 예의 주시해야 한다.

유종호 문학평론가·전 연세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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