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이기홍]‘미국의 힘’이 만들어지는 곳

  • 입력 2007년 5월 24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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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여름 워싱턴에 온 뒤 줄곧 생각하는 주제는 ‘미국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미국은 우리와 어떻게 다른가’이다.

그런데 (아직은 피상적인 관찰일 수 있지만) 실망스럽게도 한국 사회에서 경험한 부정적 단면들은 워싱턴에서도 대부분 발견된다. 정도의 차는 크지만, 여기도 난폭운전족에서부터 무사안일한 공무원, 불친절한 전화상담원, 힘 있고 돈 가진 사람에게만 상냥한 아부꾼, 의견과 이념의 차이를 도덕적 차이로 매도하는 자칭 진보주의자… 한국에서 낯익은 행태들은 다 목격된다.

국가 지도층급으로 올라가도 마찬가지다. 저 위치에 저 정도 수준밖에 안 되는 사람이 앉아 있었나 싶은 행동들이 연일 언론에 등장한다.

#점심시간에 만난 조지타운대의 W 교수는 요즘 워싱턴에서 평판이 망가진 대표적 고위급 인물로 조지 테닛 전 CIA 국장과 앨버토 곤잘러스 법무장관을 꼽았다.

테닛 전 국장은 최근 발간한 회고록에서 “9·11테러를 앞두고 백악관에 경고했지만 강경파가 듣지 않았다”며 이라크 대량살상무기(WMD) 정보 판단 잘못이 백악관의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방송에도 잇따라 출연해 “알 카에다의 미국 공격이 임박했음을 백악관 안보보좌관에게 수차례 강조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억울함을 벗겠다는 그의 시도는 제 얼굴에 침을 뱉는 격이 된 것 같다. 뉴욕타임스는 ‘늦었으면 쓰질 말든가(Better never than late)’란 제목의 칼럼에서 자신의 신원(伸寃)을 위해 뒤늦게 친정을 비판하고 나선 공직자의 자세를 지적했다.

W 교수는 “자기가 몸담았던 친정을 퇴임 후 공격하는 행태가 워싱턴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고 평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최측근 곤잘러스 법무장관의 ‘사소한 한마디’도 씻지 못할 나쁜 인상을 남겼다. 정치적 이유로 검사들을 무더기로 해임하는 데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아 온 곤잘러스 장관은 지난주 초 폴 맥널티 부장관이 사임하자 “그를 그리워할 것이다. 사실 나는 검사 해임 문제를 전적으로 그에게 맡겨 왔고 그의 의견을 존중해 왔다”고 말했다.

책임 떠넘기기의 의도가 엿보이는 이 발언에 민주당의 사임 요구를 정치적 공세라고 비판해 온 사람들조차 ‘그릇의 크기’를 보여 준 발언이라며 실망을 금치 못하는 분위기다.

#“질문이 있는데, 내 귀가 아직도 붙어 있어?”

실종된 동료 수색 작업 중 매설된 폭발물이 터져 피범벅이 된 채 쓰러진 병사가 응급처치를 하는 구급병에게 씩 웃으며 묻는다.

사무실에 돌아와 미국 언론이 중계하는 바그다드 남부 실종 미군 수색 작업 현장을 보노라니 장엄함마저 느껴진다. 12일 실종된 3명의 병사를 찾아 매일 4000명의 미군이 인근 지역 하천 변을 열흘째 샅샅이 뒤지고 있다. 다쳐 쓰러졌으면서도 “동료를 찾는 임무만큼 고귀하고 명확한 목표가 어디 있느냐”고 말하는 어린 병사의 멘트는 ‘가공된 게 아닐까’라는 의심이 들 정도다.

#오후 3시 반경 한 공립 초등학교 앞을 지나다 보니 보통 스쿨버스보다 작은 노란색 미니버스 4대가 줄지어 서 있다. 잠시 후 현관문이 열리고 교사들이 휠체어에 앉은 학생 4명과 함께 나왔다. 버스 한 대에 한 명씩 탄다. 집 방향이 제각각인 장애인 학생들을 위해 자가용처럼 운행하는 것이다. 떠나는 버스에 손을 흔들어 주는 교사에게 물었다. “한두 명을 위해 버스 한 대씩을 운행하려면 부담이 크지 않으냐”고. 돌아온 대답은 너무 간단했다.

“저들이 (배려해야 할) 최우선이다. 세금을 내는 건 이런 걸 위해서가 아닌가.”

이기홍 워싱턴 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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