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오명철]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입력 2007년 5월 24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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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대학 졸업 25주년 재상봉 행사가 열려 모교에 갔다. 모교는 해마다 졸업 25주년과 50주년을 맞는 동문들을 초청해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졸업 25주년을 맞는 중년들의 감회가 만만치 않으니 50주년을 맞는 노동문들의 감격이야 이루 어찌 말하랴.

5월의 신록과도 같은 학창시절

평소 즐겨 가는 캠퍼스지만 졸업 동기들을 한꺼번에 만나니 5월의 신록과도 같았던 학창 시절 그들을 다시 보는 듯 마음이 싱그러워졌다. 어느덧 중년이 된 그들의 얼굴에서 감회와 회한이 느껴진다. 25년 전 캠퍼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도 있고 생면부지의 얼굴도 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도서관에도 들어가 보고 옛날에 즐겨 찾아가던 곳들도 거닐었다. 내 젊은 날이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게 무척이나 위안을 주던 윤동주 시인의 서시(序詩)가 새겨진 시비(詩碑)는 그대로 있었으나 ‘소년은 내일은 오늘과 다르리라 생각하며 살았습니다’라고 쓰여 있던 방송탑은 사라져 버렸다.

내 대학 시절은 “학교 간 날보다 휴교 등으로 안 간 날이 더 많다”고 얘기할 정도로 시대와 불화를 겪었다. 대학 사무실에 까만 양복을 입은 학원 사찰 요원이 상주하다시피 하고 유인물 몇 장 뿌리다 개처럼 두들겨 맞으며 잡혀갈 때였다. 도대체 왜 그래야만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공부하는 학생보다는 운동하는 학생이 더 정신적 우월감을 갖고 있던 시절이긴 하지만 도서관에 파묻혀 지내는 면학파도 적지 않았다. 어느 쪽이 더 나라에 기여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는가는 쉽게 결론 내릴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교수님들은 드러내 놓고 말하진 못했지만 강의 도중 적절한 비유와 은유로 시대의 문제를 짚어 주곤 했다.

그 와중에도 축제는 열렸다. 운동권 학생들이 대학의 향락문화 운운하며 비난을 하곤 했지만 ‘쌍쌍파티’가 축제의 대미를 장식하곤 했다. 학생들은 파트너를 구하느라 조바심을 태웠고 양복과 드레스를 구하느라 분주했다. 파트너를 여럿 초청해 놓고 이리저리 오가다 들켜 곤욕을 치른 경우도 있었고, 대타로 나갔다가 결혼에 이른 친구도 있다. 축제의 끝은 대개 ‘가자 가자’라고 부르던 ‘고고 타임’으로 마무리 짓곤 했다. ‘의식 있는’ 학생들은 탈춤으로 시대를 풍자 비판하곤 했으나 이 또한 수위를 조절해야 했다. 축제도 저항도 여의치 않았던 이들은 차라리 여행을 떠나곤 했다. 축제와 ‘운동’이 함께 어우러져야 진정한 대학이라는 의식을 갖게 된 것은 졸업 후 여러 해가 지나서였다.

돌이켜 보니 물질적으로는 가난했지만 정신적으로는 풍요로웠던 시절이었다. 청바지 통기타 생맥주로 상징되는 문화의 연대였던 것이다. 대학가요제가 있었고, 김민기 양희은 4월과 5월 어니언스 등이 우리의 고뇌와 사랑을 대변해 주곤 했다. ‘아침이슬’은 우리 시대의 애국가나 다름없었다.

25년 전 생각했던 나라의 장래

결혼을 작정하려면 남자는 직장이 있어야 하고 여자는 시부모 모시는 것을 당연시하던 시절이었다. 여학생들은 오후 9시가 넘으면 귀가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여학생 집에 전화를 걸었다가 어른들한테 불호령을 맞는 경우도 있었다. 캠퍼스에서 남녀가 손을 잡고 다니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당시 우리 세대가 생각했던 나라의 장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도 곰곰 생각해 본다. 대통령직선제 실현과 군부독재 타도 정도가 아니었을까 한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 둘이 동시에 실현되고,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린 두 대통령이 나란히 법정에 서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고 월드컵 개최국이 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두 김 씨가 차례로 대통령이 돼 그렇듯 국민을 실망시키게 될 줄도 몰랐다. 인터넷과 휴대전화가 등장해 이처럼 세상을 바꾸고, 대통령 한 사람이 이렇게 나라의 근간을 흔들게 될 줄 또한 짐작도 못했다. 모두 지난 25년 사이 벌어진 일이다.

오명철 편집국 부국장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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