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엽]‘밀양’에 대하여

  • 입력 2007년 5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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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을 어떻게 봐야 할지? 영화 보는 데 뭐 그리 심각하냐고 할 테지만, 이 감독의 문화관광부 장관 시절 출입기자로 ‘특별한’ 경험을 한 필자에겐 그게 만만치 않다.

이 감독은 4년 전 장관으로 취임한 직후 ‘홍보업무 운용 방안’을 발표해 현 정권의 언론정책을 처음으로 가시화했다. 공무원의 기자 접촉 후 보고 등을 발표하면서 그는 “언론에 관한 한 노무현 대통령의 분신”이라며 기자들에게 “특종을 하려면 쓰레기통을 뒤지라”고 했다. 신문정책 주무부처의 장으로서 사실상 ‘언론에 대한 선전포고’였고, 현 정권의 신문에 대한 공세는 지금도 멈추지 않고 있다. 22일 논란이 된 ‘취재지원 선진화 방안’도 4년 전 방안을 확대 재생산한 것이다.

기사를 위해 쓰레기통보다 더 한 것도 뒤지지만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발표하는 이 장관의 태도와 말은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영화인으로서 언론을 알 만큼 알았을 텐데도, 돌변한 그를 보고 “여러 얼굴을 가진 배우를 다루는 감독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현 정권은 신문뿐 아니라 기자 직업에 대한 자존심에도 여러 차례 상처를 입혔다.

‘밀양’은 이 감독이 장관직을 떠난 뒤 영화계에 복귀해 만든 작품이다. 내용도 정치와 상관없다. 그러므로 그냥 보는 게 논리적으로 맞지만 필자에겐 기자회견이나 국정감사장에서 ‘마이웨이’를 걷던 이 장관의 표정이 오버랩된다. 기자로서 과거의 기억으로 현재를 재단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는데도….

한 친구는 “마흔 넘어 오래 살려면 복기하지 마라”고 했다. 나쁜 기억은 잊어버리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는 뜻이다. 필자와 같은 체험을 하지 않은 기자 중에는 “영화는 영화로 봐야 한다”고 한 이도 많았다.

‘밀양’은 아직 개봉이 안 돼 리뷰 기사로만 보면 화해를 둘러싼 인간의 문제를 제기하는 듯하다. 주인공 신애(전도연)는 신을 만난 뒤 아들의 유괴범을 용서하러 갔다가 그에게서 ‘이미 신의 용서를 받아 편안하다’는 말을 듣고 절규한다. 섣불리 화해하려 했다가 더 상처받은 것이다.

이 영화는 주인공이 자살하는 원작과 달리 화해는 신이 아니라 인간의 몫이며 그것이 어디까지 가능한지를 묻는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유괴당한 아이들의 부모들이 유괴범을 죽이는 명쾌한 답에 비하면 ‘밀양’은 문제만 냉혹하게 들이민다.

고민은 필자만 하는 게 아닐 듯하다. 현 정권은 물론 그에 코드를 맞춘 이들이 사납게 몰아붙이는 통에 상처받은 사람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집권 기간 내내 얼마나 많은 불도장을 찍어 댔던가?

상처를 입은 이들은 곧 물러날 ‘이 정권의 사람들’을 조우했을 때 어떻게 대할지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응어리를 털고 악수를 청할지, 옛일을 들먹이며 멱살잡이를 할지, 소 닭 보듯 할지…. 뭐든 준비해야 ‘섣부른 화해’를 피할 수 있지 않겠는가.

‘밀양’은 칸 영화제에 초청돼 23일 시사회가 열린다. 전도연 씨의 연기가 국내 언론의 호평을 받았으니 현지 평가도 기대된다. 이 감독이든 전 씨든 수상하기 바란다. 참여정부평가포럼의 멤버인 이 감독의 신문관이 바뀌었을 리 없지만 섣부른 화해보다 ‘일단’ 복기하지 않기로 했다. 친구의 말을 듣기로 했고, 무엇보다 정권은 짧지만 신문은 길기 때문이다.

허엽 문화부 차장 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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