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택 칼럼]대통령의 PTSD的 언론관

  • 입력 2007년 5월 22일 19시 36분


코멘트
집권 기간 내내 언론을 공격하는 노무현 대통령의 적대적 언론관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을까. 유시민 의원이 2002년 출간한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를 들여다보면 궁금증이 어느 정도 풀린다. 노 대통령과 언론의 질긴 악연은 1991년 통합민주당 대변인에 임명됐을 때 조선일보의 작은 프로필 기사가 발단이 됐다. ‘고졸 변호사 출신, 지나치게 인기를 의식, 부산 요트클럽 회장으로 상당한 재산가’라는 요지였다.

피해의식에서 나온 언론공격 심리

노 대변인이 프로필에 발끈해 해명 자료를 언론사에 배포한 뒤 주간조선이 보완 취재를 해 다시 기사를 쓰자 그는 소송을 내 1심에서 승소했다. 전후 맥락을 살펴보면 노 대통령의 언론관은 일종의 ‘외상(外傷)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해당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 정부 출범 이후 노 대통령의 거듭되는 막말로 언론과 언론인은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일일이 사례를 들기도 부질없지만, 민주국가의 대통령이 피 말리는 취재경쟁을 하는 기자들을 향해 ‘기자실에 죽치고 앉아 담합한다’는 말을 온전한 정신으로 할 수 있다고는 믿을 수 없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처럼 ‘난 한 놈만 패’라는 전략을 썼다(유시민 책). 대통령이 돼 힘이 붙자 주류(主流) 신문 전체로 전선(戰線)을 넓혔다. 일부 언론학자와 언론단체들은 대통령의 피해의식에서 나오는 언론 공격을 ‘언론 개혁’으로 포장하는 논리를 제공했다. 이제는 임기를 9개월 남겨놓고 언론 전체를 상대로 새 전쟁을 선포했다.

어제 국무회의는 정부 부처의 기자실을 폐쇄하고 서너 군데 브리핑룸에서 관리가 불러 주는 것이나 받아 적으라는 지침을 의결했다. 남미 이구아수 폭포 혁신 세미나 공금 출장이나 대통령 측근 안희정 씨의 비밀 대북접촉 같은 것은 감춰두고, 브리핑해 주는 홍보성 기사나 보도하라는 것이다.

유신독재 시절에 국방부 기자들은 기자실과 화장실만 출입이 가능했다는데, 노 정권은 기자실을 아예 없애고 화장실만 남겨두었다. 취재 원천봉쇄 제도를 ‘취재지원 선진화(先進化) 방안’이라고 작명(作名)한 것은 조롱인지 말장난인지, 대통령의 뒤틀린 심사를 종잡을 수 없다. 이른바 진보라는 친노(親盧) 매체까지 ‘취재활동 위축과 국민의 알 권리 제한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걱정된다’는 사설(社說)을 쓸 정도다.

이 정권은 신문법과 공정거래위원회를 통한 신문 목 죄기로는 모자란다고 판단했던지 종이신문을 저격하는 신종 미디어를 육성했다. 포털은 100곳 이상에서 8000여 개 기사를 공급받아 이 중 200여 개 뉴스를 골라내는 언론권력을 행사한다. 그런데도 신문법은 ‘자체기사 생산 비율이 30%를 넘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아 공룡 포털을 인터넷신문에서 빼주었다. 포털은 아무런 규제를 받지 않고 80여 종의 사업을 하며 언론 기능까지 하는 문어발 재벌기업으로 성장했다.

권력의 醉氣에서 깨어난 뒤가 궁금

노 대통령은 작년 6월 포털 대표들을 청와대로 불러 “포털은 중요한 언론기능을 하고 있다”고 격려했다. 그는 언론에 관한 한 더블 플레이의 명수다. 종이신문에 대해서는 ‘건강한 긴장관계’라는 수사(修辭)를 써가며 괴롭히면서 포털과는 드러내 놓고 권언(權言)유착을 한다.

‘취재지원 선진화 방안’은 이름과는 반대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후진적 언론탄압 정책이다. 미국은 의회에서 언론 자유를 제약하는 법률을 만들 수 없다고 헌법에 규정돼 있는데, 한국은 헌법에 보장된 언론 자유를 국무회의 의결로 제한하는 나라다. 언론 자유는 모든 자유의 초석이라는 점에서 한국 민주주의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개인적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권한을 남용하는 대통령 밑에서 9개월 시한부 언론대책을 만드는 청와대와 국정홍보처의 하수인 중에는 언론사나 언론단체 기관지에서 밥을 먹던 사람들도 있다. 자유 언론을 짓밟고 옛 동료들의 자긍심에 칼질하는 사람들이 머지않아 권력의 취기(醉氣)에서 깨어날 때는 어떤 모습일지 똑똑히 보고 싶다.

※PTSD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황호택 수석논설위원 hthwang@donga.com

** 황호택이 만난 인생리더 10인 ‘그들에게 길을 물으니’**

꿈을 팔아 기부금 모으는 총장(숙명여대 이경숙 총장)
물처럼 부드럽게 돌처럼 강하게(강신호 전경련 회장)
공민학교 소년이 법무부장관 되다(김성호 법무부장관)
늘 '처음처럼' 사는 은행원(신상훈 신한은행장)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삶(영화배우 최은희)
변화하는 노동운동에 앞장선다(이용득 한국노총위원장)
야구도 인생도 숫자에 밝아야 성공한다(한화이글스 감독 김인식)
국제관계의 흐름 속에서 역사를 본다(최문형 한양대 명예교수)
경쟁력 있는 사학운영의 꿈(이돈희 민족사관고 교장)
경제를 끌고 가는 힘은 기업에서 나온다(손경식 대한상의 회장)


그들에게 길을 물으니
황호택이 만난 인생리더 10인
지은이 : 황호택
가격 : 11,000 원
출간일 : 2006년 11월 24일
쪽수 : 351 쪽
판형 : 신국판
분야 : 교양
ISBN : 8970904956
비고 : 판매중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