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은 南편가르고… 南은 北눈치보고…

  • 입력 2007년 5월 19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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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 하루 뒤… 다시 적막해진 철길 18일 경기 파주시 자유의 다리에서 관광객들이 전날 56년 만에 경의선 열차가 통과했던 철교를 바라보고 있다. 파주=변영욱  기자
축제 하루 뒤… 다시 적막해진 철길
18일 경기 파주시 자유의 다리에서 관광객들이 전날 56년 만에 경의선 열차가 통과했던 철교를 바라보고 있다. 파주=변영욱 기자
“고맙다… 건강하라” 극진
“고맙다… 건강하라” 극진
이종석 前통일 찬밥신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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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자주” 발언 쏟아져
“통일” “자주” 발언 쏟아져
《경의선과 동해선 열차가 17일 반세기 만에 군사분계선(MDL)을 넘어 남북을 오갔다. 땅길 바닷길 하늘길에 이어 철길이 연결되면서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발전을 거듭해 온 남북 관계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남과 북의 지도급 인사들이 대거 참여해 공동으로 진행된 이번 행사는 ‘주면서도 눈치 보는’ 비정상적인 남북 관계의 현주소를 압축적으로 보여 줬다는 지적이다.

북측은 여전히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인사에 대해서만 ‘귀하신 분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호의를 베풀었다.

반면 호락호락하지 않은 태도로 비위를 거스른 인사들에 대해서는 ‘까칠한’ 태도를 보이며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한편 반세기 만의 빅 이벤트에 초청장을 받은 정치인들은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킬 수 있는 호기를 활용하려는 듯 일부 과장된 행동을 보여 쓴웃음을 자아냈다.》

▼北단장, 리영희-한완상씨에 보은의 술잔▼

경의선 북측대표단장을 맡은 권호웅 내각책임참사는 17일 시종일관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를 극진히 챙겨 눈길을 끌었다.

권 참사는 특히 이날 개성 자남산 여관에서 열린 공동오찬 도중 리 전 교수가 있는 테이블로 찾아와 백로술을 권하며 “1994년 핵확산방지조약(NPT)에서 탈퇴할 때 민족적인 선의의 글을 쓰신 것을 인상 깊게 읽었다”고 말했다.

북한은 1993년 3월 NPT 탈퇴 선언을 한 데 이어 1994년 6월 13일 국제원자력기구(IAEA)에서 탈퇴했고 리 전 교수는 그 이틀 뒤인 15일 출간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책에서 “미국의 대북한 전쟁행위 불사의 단계에 있다”며 “유일 군사초강대국으로 남은 미국의 노골적 패권주의로 군사적 갈등 충돌 상태가 진행 중”이라고 주장했다.

권 참사는 이어 “붓을 놓으면 안 된다. 말로 해서라도 후손에게 글을 남겨야 한다. 건강해야 한다”며 진심 어린 걱정을 아끼지 않았다.

리 전 교수는 이에 고무된 듯 어눌한 말투로 “(내가) 20∼30년 길러 낸 후배 제자들이 남측 사회를 쥐고 흔들고 있다. 내 건강은 너무 걱정하지 마라”고 화답했다.

1993년 3월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 시절 비전향 장기수인 이인모 노인을 조건 없이 북송했던 한완상 대한적십자사 총재에게도 권 참사는 ‘호의’를 표했다. 그는 “리인모 선생 건강하다. 한 총재가 숭고한 인도주의로 한 것”이라며 ‘보은(報恩)’의 술잔을 권했다.

권 참사는 이 밖에도 고은 시인과 고 문익환 목사의 부인인 박용길 장로에 대해서도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北에 찍히면 낭패” 南참석자들 몸조심▼

반면 권 참사는 직전 통일부 장관인 이종석 전 장관에 대해서는 싸늘한 태도로 일관해 대조를 보였다. 술을 권하지 않은 것은 물론 오찬이 끝나고 돌아갈 때 이 전 장관이 “통일을 위해 많이 노력해 달라”는 덕담을 건넸음에도 즉답을 하지 않고 알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리며 얼버무렸다.

열차 시험운행에 참가한 관계자들은 “지난해 7월의 미사일 발사 직후 쌀과 비료 지원을 중단한 것에 대한 앙금이 남아 있는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우연의 일치인지 이 전 장관과 마주 앉도록 돼 있던 북측 인사들도 자리를 비워 이 장관은 ‘외로운’ 열차 여행을 해야 했다.

이 전 장관은 겸연쩍은 듯 “글쎄,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네”라며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전 장관의 학습효과 탓인지 남측 정치인이나 참석자들은 북한 인사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동해선 대표단장을 맡았던 이용섭 건설교통부 장관은 북측 대표단장인 김용삼 철도상이 “수령님(김일성 주석) 계실 때 연결됐으면 더 좋았을 텐데. 생전에 통일열차를 구상했는데”라고 말하자 “화장실에 가야 한다”며 ‘위기’를 모면했다.

한 참가자는 “항상 북한에 오면 불편하다. 언제 어떤 말로 트집을 잡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나라당에 대한 반감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한나라당 간사인 진영 의원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경의선 승차 후기’라는 글에서 “개성 공동 오찬 중 열린우리당 김원웅 의원이 권호웅 내각책임참사에게 나를 한나라당 간사라고 소개하자 권 참사는 ‘한나라당이란 말은 하지 마세요. 여기 있는 사람들 밥맛이 떨어집니다’라고 말했다”고 적었다.

통일운동에 뚜렷한 기여 없이 문화계 인사 자격으로 동해선 승차권을 따내 구설에 올랐던 명계남 씨는 남측 공동취재단이 소감을 묻는 것에는 답하지 않은 채 북측 인사들과는 쾌활한 모습으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여러 차례 목격돼 ‘(북한에만) 친절한 계남 씨’라는 빈축을 샀다.

▼“역사적 순간 노래 한곡…” 의원님들 쇼쇼쇼▼

열차 시험운행은 언론의 주목을 받기 좋아하는 정치인들이 벌인 한편의 ‘쇼 장’이기도 했다.

열린우리당 배기선 의원은 이날 낮 12시 18분 경의선 열차가 군사분계선을 통과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역사적 순간에 노래라도 불러야 하지 않나”라며 ‘우리의 소원’ 합창을 유도했다.

한나라당 정문헌 의원은 남측 제진역에서 ‘반갑습니다’라는 북측 노래가 울려 퍼진 데 대해 김 철도상이 관심을 표하자 “나는 ‘심장에 남는 사람’이라는 노래가 좋았다”며 “철도상께서는 제게 그런 사람인 것 같다”고 말했다.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경의선 행사장에 나타나 눈길을 모은 김원웅 의원도 북측이 강조하는 ‘우리민족끼리’에 동조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그는 개성역에서 남측으로 돌아오기 직전 권 참사에게 “다음에는 광주, 부산 가는 차표를 개성역에서 끊을 수 있도록 통일을 앞당기자”고 말한 뒤 “이번 행사는 우리 운명을 더는 남에게 맡기지 않겠다는 자주적 의지와 역량을 안팎으로 과시한 행사”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하태원 기자 taewon_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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