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 노래하는 ‘알파걸’ 순정 부르는 ‘베타보이’

  • 입력 2007년 5월 16일 03시 00분


코멘트
문제. 다음 중 여자가수의 노래는?

①"내 맘대로 미쳐볼래 이 밤 속에 펼쳐지는 나의 행진 / 삶에 지쳐버린 에브리데이 / 누가 뭐라 해도 오늘 밤은 제끼는 거야…"

②"꿈에서라도 만난다면 가지 말라고 하겠어요 / 이별 길을 넘어가시다 발병이라도 나신다면 / 못난 내 품에 잠시 쉬어가세요…"

가요 가사를 통해 본 남녀 권력관계

반말과 명령조 등 강한 화법을 구사하는 1번에 비해 2번은 여리고 조심스럽다. 그럼 답은 2번? 아니다. 1번은 여가수 렉시의 3집 타이틀곡 '하늘위로'. 2번은 남성그룹 'sg워너비'의 '아리랑'이다.

2007년 가요계는 지금 '권력 이동' 시대를 맞고 있다. 사랑에 대해 강한 남자, 그런 남자를 만난 행복한 여자가 과거 가요의 고정된 화자였다면 이제는 렉시처럼 남자를 휘어잡을 것 같은 알파걸(남성보다 능력이 뛰어난 여성을 뜻하는 말), 'sg워너비'처럼 여자에게 애원하는 베타보이(알파걸과 반대되는 남자를 뜻하는 말)가 대중을 파고들고 있다.

○ 베타 보이 VS 알파걸… 가사에 나타난 권력 이동

온라인 음악사이트 '벅스뮤직'의 5월 첫째주 종합차트 1위는 'sg워너비'의 '아리랑'. 시인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연상케 하는 '애이불비(哀而不悲)'의 남성상을 가사에 옮겼다. 2위곡인 3인조 남성 그룹 '엠시 더 맥스'의 '가슴아 그만해' 역시 가슴을 쥐어뜯을 정도로 지고지순한 사랑을 담고 있다(가슴아, 눈물아, 한숨아, 사랑아 왜 잊지 못하니 / 그 이름, 그 얼굴, 그 웃음, 그 전부를 어떻게 잊겠니)

윤건의 신곡 '사랑으로 빚진 날들'(내 사랑은 영혼까지 너만 알아서 / 난 한눈 한번 팔지 못하지 / 한 올의 머리카락조차 아는 걸)과 이승철의 '시계'(그대 생각에 난 잠 못 이루죠 / 아픈 만큼 그대가 다시 돌아온다면 얼마든지 힘들 수 있어요)의 '해바라기' 사랑을 노래한다. 소심하고 나약한 남성의 모습은 이기찬의 '미인'에서 극대화 된다. '다시 사랑한다 해도 다른 누군가를 만나도 / 나는 너와 같은 사람 다신 만나지 못해'라는 가사는 자기비하에 이어 절망적 사랑의 주인공이 되려 한다.

남자 가수들이 사랑의 객체로 전락한 반면 여자 가수들은 사랑에 대해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처한다. 아이비의 '유혹의 소나타'(내 손만 잡으려말고 날 안아봐 / 난 널 유혹하는 거란다)나 길건의 '흔들어봐'(미안하다면 다야 / 너는 진실한 사랑을 몰라)처럼 반말로 남성을 다그치거나 사랑을 가르치는 것은 기본, 서인영의 '너를 원해'(너를 원해 오늘 하루만 / 난 그저 짧은 사랑을 원하는 거야)처럼 적극적인 '대시'도 서슴지 않는다.

섹시함과 상관없는 여가수들도 알파걸을 자처한다. '피아노 록' 가수 윤하도 '비밀번호 486'(여자는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아 / 하루에 네 번 사랑을 말하고 여덟 번 웃고 여섯 번의 키스를 해줘)을 통해 자신 만의 사랑을 주장하고 발라드 여가수 리사는 '시작보다 끝이 아름다운 사랑'(나에게 기대 쉴 수 있는 편안한 친구 같은 사랑을 네게 주고 싶어)에서, 6년 만에 컴백한 '한스밴드'는 신곡 '유 스마일, 돈트 크라이'(니 행복 내가 더 해줄게 / 그 눈물 내가 닦아줄게)에서 남자를 보듬는다.

○ 남성의 여성화 VS 여성의 남성화?

가사에 나타난 권력 이동은 사회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문화평론가 김헌식 씨는 "중년 남성의 위기론이나 '메트로섹슈얼' '크로스섹슈얼' 같은 남성의 여성화 등 남성의 마초성이 사라지는 동안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활발해졌고 유교 문화에 억압돼 온 여성의 성적 욕구마저 분출된 상황"이라며 "가요계에서는 엄정화, 이효리가 추구해온 섹시하고 당당한 여성상이 각광을 받는 반면 남자 가수들은 이를 능가할만한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했고 결국 사랑의 주도권마저 빼앗겼다"고 말했다.

특이한 점은 이 같은 가사를 대부분 남자 작사가들이 만들고 있다는 것. 'sg워너비'의 '아리랑'을 작사한 안영민 씨는 "남자 가수들에게 감성적인 가사를 입히면 남녀 모두가 공감한다"며 "반대로 '씨야' 같은 여가수들의 가사에는 '백 번 / 천 번 / 만 번' 같은 강한 어투를 많이 쓰는 편"이라고 말했다.

가수들 역시 공감하는 분위기다. 윤건은 "남자 가수지만 풍부한 감정을 가진 노래가 필요하다"라고 지적했고 여가수 렉시는 "노래를 부를 때 능동적이고 강한 여성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즐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문제점도 지적된다. 가요계 약한 남자와 강한 여자의 부각은 음악 장르의 고정화를 야기시킬 우려가 있다는 것. 남자 가수들이 대부분 발라드로 일관해 왔다면 여자 가수들은 섹시 댄스를 히트공식으로 여겨왔다. 자연히 발라드 특유의 서정성이 남자 가수들을 지고지순하게 만들고 감각적인 섹시 댄스는 여성 가수들을 육체적 사랑에 목마른 '작업녀'로 만든 것이다. 음악 평론가 임진모 씨는 "남성의 마초적 이미지와 여성의 순종적 이미지를 깨는 것이 현재 가요계의 '쿨'한 문화로 여겨지지만 이 현상도 자리를 잡으면 이를 능가하는 새로운 트렌드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김범석기자 bsism@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