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참 여직원 기획실 갔다고?”…“등-초본 떼주려 공부했나”

  • 입력 2007년 5월 12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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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올림픽컨벤션센터에서 9급 공무원 시험 응시자들이 면접시험을 보고 있다. 안정적 직장을 찾는 대학 졸업 이상의 고학력자가 9급 공무원직에 몰리면서 ‘공직사회에 우수 인력이 확충된다’는 기대와 ‘고교 졸업자가 할 수 있는 일을 대졸자가 하고 있어 국가적으로는 인력 운용의 손실’이라는 우려가 엇갈린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지난해 9월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올림픽컨벤션센터에서 9급 공무원 시험 응시자들이 면접시험을 보고 있다. 안정적 직장을 찾는 대학 졸업 이상의 고학력자가 9급 공무원직에 몰리면서 ‘공직사회에 우수 인력이 확충된다’는 기대와 ‘고교 졸업자가 할 수 있는 일을 대졸자가 하고 있어 국가적으로는 인력 운용의 손실’이라는 우려가 엇갈린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대단한 9급

‘말단’의 한계를 넘어 수천억 원의 예산을 주무르는 신출내기 시청 직원, 홍보대행사 못지않게 구정 홍보물을 만들어 내는 9급 직원, 동료보다 절반이나 짧은 기간에 발탁 승진한 시청 직원….

보수적인 공무원 사회에 ‘말단’인 9급들이 변화의 바람을 가져오고 있다.

서울 서초구청의 모 과장은 “지금 9급 공무원들이 아마 10년, 15년 뒤에는 공무원 사회를 완전히 뒤바꿔 놓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 ‘슈퍼 9급’ 시대

서울 서초구청 총무과 9급 직원인 김모(31) 씨는 이달 초 구청 홍보 팸플릿 제작을 주도했다. 구청 간부가 원래 외부기획사에 주던 일을 시험 삼아 “한번 시안을 만들어 보라”고 김 씨에게 지시하자 그는 며칠 밤을 새워 외부기획사 뺨칠 정도의 ‘작품’을 만들어 왔다. 김 씨는 외국어고와 사립 명문대를 나온 ‘9급 인텔리’. 하익봉 총무과장은 김 씨를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아이디어맨”이라고 칭찬했다.

같은 구청의 김모(36) 씨는 올해 초 7급으로 승진했다. 9급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한 지 정확히 7년 만의 일. 보통 13, 14년 걸리는 기간을 절반으로 줄였다.

김 씨의 파격 승진은 직급과 업무의 한계를 넘어선 노력의 산물이다. 지방 국립대를 졸업한 뒤 중소기업에 다니다 공무원의 길로 뛰어든 그는 처음 5년간 동사무소를 옮겨 다녔다. 그러나 자투리 시간을 쪼개 어학과 컴퓨터 공부를 하면서 끊임없이 자기 계발에 몰두했다.

2005년 구청으로 옮긴 김 씨는 진흙 속에 묻힌 정책들을 발굴하고 계량화하는 데 성공해 행정자치부와 서울시 혁신경진대회 등에서 서초구청에 연이어 대상의 영광을 안겨 줬다.

○ 경쟁 바람을 일으키는 신입 직원

열정과 능력을 갖춘 고학력 9급들의 등장은 연공서열이 몸에 밴 공무원 사회에 ‘경쟁’이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뿌리내리게 하고 있다.

최근 적지 않은 자치단체에서 ‘만학(晩學) 열풍’이 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고학력 하위직들이 대거 들어오면서 중간간부들 사이에서 “뭔가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위기감이 배움의 열기로 이어지는 것. 지금까지 방송대나 야간대학 등을 거쳐 학위를 취득하거나 공부하는 간부들이 용인시청에만 줄잡아 50명에 이른다,

학습 의욕이 높은 9급들은 조직에 끊임없이 학습 기회 제공을 요구하고, 자연스럽게 배움의 열기가 공직사회 전체로 퍼져 나간다.

강원도청은 3, 4년 전부터 직원을 대상으로 영어 일본어 중국어 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교육시간이 출퇴근 전후여서 짬을 내기가 쉽진 않지만 최근 희망자가 늘어나는 추세다.

울산시청에도 외국어 붐이 일면서 올해 들어 각종 외국어 시험 등급을 취득한 직원이 50명에 육박하고 있다.

성남시청 박상복 공보담당관은 “처음에는 후배들에 비해 부족한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공부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제는 자기 실력을 키우기 위한 상시 교육체제가 자리를 잡았다”고 밝혔다.

○ 변화의 중심에 있는 ‘여풍(女風)’

광주 동구청은 1월 3년차 9급 여직원 3명을 한꺼번에 기획실로 옮겼다. 구청 안팎에서는 ‘상상도 못한 인사’라며 술렁거렸다.

고모(28) 씨 등 3명은 모두 동사무소 근무 경력이 전부였지만 기획과 홍보 파트로 자리를 옮긴 뒤 제 몫을 거뜬히 해내고 있다. 걱정 일색이었던 주변 직원들은 반년도 안 돼 이들에게 ‘동구의 미래를 이끌어 갈 여성 트로이카’라는 별명을 붙여 줬다.

유태명 동구청장은 “불과 수년 전만 해도 신참 여직원이 기획실에 근무하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지만 이들의 참신한 창의력과 상상력을 기대하고 결단을 내렸다”고 말했다.

부동산, 건축, 세금 업무도 고학력 9급 직원들에게 있어서는 ‘금녀의 영역’이 아니다. 딱딱하기만 한 업무에 부드러움도 가미하고 비리 우려도 낮출 수 있다는 기대 덕분이다.

수원시청 이기복 인사팀장은 “여직원은 비리 관련 잡음이 없고 민원인들에게 짜증도 내지 않고 친절하게 설명해 줘서 고객 만족도가 높다”고 말했다.

광고회사 직원보다 더 튀는 아이디어로 직장에 새바람을 불어넣는 일에도 여성 9급이 앞장선다.

대구 북구청에 근무하는 남모(27·여) 씨는 자신이 진행하던 아침 음악방송을 올해 1월부터 ‘북구청 월요데이트’로 업그레이드했다. 아이디어를 낸 남 씨가 제작, 연출, 진행까지 1인 3역을 맡았다. 10분 남짓한 시간이지만 직원들이 돌아가면서 본인 소개와 공개 프러포즈, 축하사연, 좋은 글 등 화젯거리를 시나리오로 작성해 ‘1일 DJ’를 하고 있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 덕분에 임용 2년 만인 지난해 말 8급으로 승진한 남 씨는 “영화 ‘라디오스타’를 보고 딱딱한 직장 분위기를 부드럽게 바꿔 보자는 차원에서 제안한 것”이라며 “구청 내 분위기가 이전보다 훨씬 밝아져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이성호 기자 starsky@donga.com

강혜승 기자 fineday@donga.com

서글픈 9급

공직사회는 말단 행정직에 쏟아져 들어오는 고학력 하위직들이 반갑지만은 않다.

“행정 서비스의 질 개선으로 이어지면 좋겠지만 동기 부여가 안 될 경우 오히려 부작용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 상사들의 우려다.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이런 고학력 9급 공무원을 활용할 방안이 마땅치 않아 대안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 단순·반복 작업 못 견디는 고학력 9급

9급직 업무가 단순·반복적 성격이 짙다 보니 고학력 출신들은 담당 업무에 쉽게 권태를 느낀다.

경기도의 한 동사무소에서 일하는 이모(25·여) 씨는 기자와 만나 “너무 후회스럽다”고 털어놨다. 사립 명문대 출신의 이 씨는 2005년도 시험에 합격해 작년부터 동사무소에서 증명서 발급 업무를 맡고 있다. 이 씨는 “반말은 기본이고 욕을 하거나 책상을 주먹으로 때리는 민원인들도 있다. 그럴 때마다 일 자체에 회의를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하루 종일 등·초본을 떼 주다 보면 ‘소모품’으로 전락한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역시 사립 명문대를 졸업하고 서울 시내 모 구청에서 주민 행사 업무를 맡고 있는 3년차 김모(31) 씨는 지금도 공직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얼마나 잘하나 보자’는 식의 시선도 따갑고, ‘그 대학까지 나와서’라는 수군거림도 끊이지 않는다. 최 씨는 “취업도 힘들고 취업을 해도 살아남기가 쉽지 않아 안정성만을 좇아 왔다는 자괴감이 심했지만 지금은 체념하고 살고 있다”고 말했다.

○ 이직 준비하는 9급

이들의 불만은 결국 이탈이나 조직 부적응으로 이어진다.

서울 강북 지역의 한 구청에서는 최근 서울대 출신의 9급 직원이 1년 만에 사표를 던져 술렁이기도 했다. 구청 관계자는 “시키는 일에 항상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더니 결국 사표를 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고 전했다. 강남의 모 구청에서도 서울대 출신의 9급 직원이 몇 달 안 돼 그만두는 일이 있었다.

수도권 한 구청의 1년차 9급 직원 이모(31·여) 씨는 “나이 제한 때문에 시험을 포기했지만 주위에는 7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동기들이 많다”고 했다.

실제로 취재팀이 서울 시내 모 구청의 2년차 9급 직원 2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70% 이상이 이직을 염두에 두고 또 다른 시험을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직원이 4명이었고, 준비를 하다 포기한 직원이 7명이었다. 8명은 “다른 시험을 볼 생각이 있다”고 답했다.

동사무소에서 근무하는 한 직원은 “미래를 생각하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7급 업무와 9급 업무가 아직도 명확히 구분돼 있어 그런 현실을 느낄 때마다 자존심이 상한다”고 시험을 준비하는 이유를 털어놨다.

○ 조직도 고민 “관리하기 힘들어”

본인들도 괴롭지만 조직 내부의 시선도 곱지 않다.

서울 모 구청의 6급 팀장은 당황스러울 때가 많다고 했다. 당연히 9급이 해야 하는 일인데도 “내가 왜 그걸 해야 하느냐”고 맞서는 직원들 탓이다. 이 팀장은 “불만이 많은 고학력 부하 직원들을 관리하기가 쉽지 않다”며 “확실히 일을 잘하긴 하지만 입이 나와 있는 부하 직원들이 좋아 보이진 않는다”고 말했다.

일부는 고학력 직원들의 역할에 의문을 표시하기도 한다. 부산의 모 구청 팀장급 직원은 “외부에서는 고학력 9급의 전면 등장으로 공무원 조직에 대혁신이 일어나지 않겠느냐고 기대하겠지만 사실 고학력과 조직 발전과는 상관관계가 높지 않다는 게 그동안 신입들을 지켜본 선배들의 의견”이라고 말했다.

우수 인력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도 조직의 고민거리. 고급 인력이 쏟아지고 있지만 인사 시스템에는 큰 변화가 없다. 9급에서 5급으로 승진하는 데 20년이 넘게 걸리고, 고학력자들을 활용할 마땅한 방안도 없다. 한 기초단체장은 “7급이면 몰라도 9급에 4년제 대졸자들이 들어오는 건 솔직히 반갑지 않다”며 “이들이 아무리 우수해도 9급 업무를 하다 보면 능력 개발을 하지 못하고 9급 수준에 머물게 된다”고 걱정했다.

○ 기회 박탈 당하는 고졸 및 전문대 졸업생

9급직이 4년제 대졸자로 채워지면서 전문대나 고졸 인력은 취업 기회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공무원을 원하는 이들은 대학에 진학해야 돼 ‘학력 인플레의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전문가들은 사회적 손실이 크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노동연구원 남재량 연구위원은 “고급 인력들이 하위직에 몰린다는 건 노동 자원이 효율적으로 배분되지 못한다는 얘기”라며 “창조적 생산 활동에 투입돼야 할 인력이 공공부문에 몰리는 건 인력 낭비”라고 꼬집었다.

강혜승 기자 fined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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