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후를 정든 내 집에서…美보스턴 비컨힐 빌리지 사람들

  • 입력 2007년 5월 12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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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보스턴 비컨힐의 한적한 주택가. 이곳에서 시작된 노인층 중심의 비영리단체 운영 경험은 미국 학계의 연구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보스턴=공종식 특파원
미국 보스턴 비컨힐의 한적한 주택가. 이곳에서 시작된 노인층 중심의 비영리단체 운영 경험은 미국 학계의 연구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보스턴=공종식 특파원
비컨힐 빌리지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는 수전 맥휘니모스 씨(왼쪽 사진). 비컨힐 빌리지에서는 매주 두 차례씩 자원봉사자(선글라스를 낀 젊은 여성)가 자신의 미니 밴을 몰고 노인 멤버들을 방문해 쇼핑을 도와준다(가운데 사진). 현재 98세로 비컨힐 빌리지의 최고령자인 도로시 와인스틴 씨가 자신의 집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다. 보스턴=공종식 특파원
비컨힐 빌리지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는 수전 맥휘니모스 씨(왼쪽 사진). 비컨힐 빌리지에서는 매주 두 차례씩 자원봉사자(선글라스를 낀 젊은 여성)가 자신의 미니 밴을 몰고 노인 멤버들을 방문해 쇼핑을 도와준다(가운데 사진). 현재 98세로 비컨힐 빌리지의 최고령자인 도로시 와인스틴 씨가 자신의 집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다. 보스턴=공종식 특파원
《노후를 자녀에게 의탁한다는 건 이미 흘러간 ‘옛 노래’.

그렇다고 정든 집을 떠나 양로원이나 노인 전용 시설에 가는 것도 마뜩하지 않다.

썰렁한 시설에 가지 않고, 자녀에게 의존하지도 않는 독립적 노후는 불가능한 것일까.

미국에서는 최근 베이비 부머들의 퇴직 러시가 본격화하면서,

노년 거주의 형태가 ‘탈(脫)시설, 홈 케어’ 방식으로 바뀌어 가는 추세다.

‘홈 케어’에 필수적인 의료, 생활 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노인들이 자발적으로 비영리 조직을 만들거나 양로원, 실버타운과 달리 독립 가구의 사생활을 보장하는 노인자치 공동체인 ‘실버 코하우징’도 생겼다.

일본에서도 전후 베이비붐 세대인 ‘단카이(團塊)’ 세대의 은퇴가 본격화되면서 집에서 노후를 보내려는 사람들을 지원하는 지역공동체의 지원망이 촘촘히 짜여졌다.

이들의 현재는 조만간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시작될 우리의 또 다른 미래일지도 모른다. 》

미국 보스턴 시의 비컨힐은 도심 한가운데에 있다. 하지만 큰 도로를 벗어나 차 두 대가 겨우 지나칠 만한 골목길에 접어들면 고풍스러운 집들이 언덕 위로 펼쳐져 있어 마치 ‘도심 속 공원’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곳에 50년 넘게 살고 있는 도로시 와인스틴(98·여) 씨. 그는 1955년 5월에 이곳에 이사 와 자녀들을 키우고 평생 이웃을 만났으며 먼저 남편을 떠나보내는 슬픔을 겪기도 했다.

즐거웠던 기억과 슬펐던 추억이 동시에 배어 있는 곳이다.

미국에선 나이가 들어 혼자 살아가기가 힘들어지면 노인 전용 시설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100세를 눈앞에 둬 집안일을 혼자하기가 쉽지 않은 와인스틴 씨는 여전히 비컨힐에 살고 있다.

비결은? 2002년부터 비컨힐에서 노인층을 중심으로 구성된 비영리단체인 ‘비컨힐 빌리지’가 출범했기 때문이다. 비컨힐 빌리지에 전화 한 통만 걸면 식료품 쇼핑, 침대시트 갈아 주기 등 크고 작은 집안일을 대신해 준다.

●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의 조언 받은 혁신 노후 모델

비컨힐 빌리지의 모토는 ‘노후를 정든 집에서(Aging at home)’다. ‘노인들만 있는 노인전용시설’로 들어가는 대신 젊은이들이 바로 옆에 있고, 친한 친구도 곁에 있고, 필요한 문화시설이 가까이 있는 정든 집에 살면서 노후를 보내자는 것이다.

출범은 하버드대 동창생 등이 주축이 된 창립 멤버 12명이 의기투합해 이뤄졌다. 창립 멤버 중 한 명으로 빌리지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는 수전 맥휘니모스(73·여) 씨는 “나이가 들어 혼자 살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수십 년 정든 비컨힐을 떠나기는 싫은 사람들이 모여 고민한 결과물이 비컨힐 빌리지”라고 설명했다.

빌리지 창립 멤버들은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의 조언을 얻어 현실적으로 가능한 노후 모델을 찾았다. 이들은 우선 근처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을 설득해 파트너로 참여하게 했고, 노인들을 대신해서 집안일을 해 줄 용역업체와 문화 및 체육활동 등 필요한 업무를 대신해 줄 파트너를 확보했다.

비컨힐 주민 중 50세 이상인 회원들은 매년 개인은 580달러, 부부는 780달러를 회비로 내면 된다. 회원이 되면 식료품 쇼핑 등 일부 서비스는 무료다.

집안일 서비스는 별도 비용을 부담해야 하지만 시중 가격보다 훨씬 싸다. 연간 소득이 5만 달러(약 4750만 원) 이하이면 연회비가 개인과 부부 각각 100달러, 150달러로 낮아진다. 현재 회원은 420여 명에 이른다.

● 높은 서비스 만족도, 비즈니스 모델로도 판매

빌리지 업무를 전담하는 직원은 4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대부분 아웃소싱을 통해 해결해 서비스 제공에 문제가 없고 비용도 줄였다.

비컨힐 빌리지는 노인 서비스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젊은 노인’들은 빌리지가 제공하는 각종 문화활동 서비스에 적극 참여하면서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다. 보스턴 일대 대학의 교수들이 강연을 하기도 하며 보스턴은 물론 뉴욕까지 함께 가서 클래식 공연을 감상하는 모임을 주최하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보스턴 일대 레스토랑을 순회하면서 점심을 먹는 ‘점심 모임’이 출범해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런 인기 때문에 ‘비컨힐 빌리지 모델’은 미국 학계에서는 이미 연구 대상으로 떠올랐다. 이 모델에 대한 연구가 잇따르고 있으며 4월 30일, 5월 1일 이틀 동안 보스턴에서는 미국 전역에서 온 4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비컨힐 빌리지 노후 모델에 대한 콘퍼런스가 열렸다. 미국은 물론 일본과 유럽에서도 방문자들이 찾아올 정도다.

● 부자 동네에서만 가능?

비컨힐 빌리지 모델에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재정자립도. 연간 예산에서 회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55% 정도다. 나머지 비용은 부유한 회원들의 기부금이나 매년 후원회 행사를 통해 충당하고 있다. 이 때문에 비컨힐처럼 1년에 10만 달러 혹은 1만 달러를 후원금으로 쾌척할 만한 부자들이 있는 동네가 아니면 이런 방식의 노후 모델을 도입하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보스턴=공종식 특파원 k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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