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프픽션]부활한 ‘신곡’의 지옥… 팩션이 맛있다

  • 입력 2007년 5월 12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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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영화 등 화려한 콘텐츠가 넘쳐 나는 21세기에도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는 소설 역군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이 있으니, 바로 ‘팩션(faction)’을 표방한다는 점이다. 팩션이란 ‘허구(fiction)’와 ‘사실(fact)’이라는 정반대의 단어가 결합된 것으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 등을 모티브로 삼아서 작가의 상상력을 더한 소설을 일컫는다. 성공한 팩션은 늘 논쟁적이다. 작품의 허구성에 초점을 맞추는 독자가 있는가 하면, 사건의 진위를 가리고자 하는 독자가 있기 때문이다.

‘단테의 신곡살인’ 역시 제목에서부터 짐작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신곡’을 모티브로 한 팩션이다. ‘신곡’만큼 지속적으로 팩션화되는 작품도 없다. 2003년에는 미국의 신인 작가 매슈 펄이 ‘단테클럽’으로 팩션 붐을 조성했었다. 이에 질 수 없다는 듯 단테의 본고장 이탈리아의 줄리오 레오니도 2004년 ‘단테의 모자이크 살인’ ‘단테의 빛의 살인’ 등을 연이어 베스트셀러에 올렸다.

2007년에는 프랑스의 아르노 들랄랑드가 다시 마계의 봉인을 뜯고 ‘신곡’을 부활시켰다. 이는 장소를 축제와 물의 도시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옮겼다. 앞선 팩션들과 마찬가지로 ‘신곡’ 중 지옥편의 순서대로 아홉 건의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식으로 전개된다. 1756년 베네치아의 극장에서 배우이자 공화국의 첩보원인 마르첼로가 십자가에 매달린 채 발견된다. 이어서 마르첼로와 부정한 관계를 맺어 온 신부가 성당 종탑에 매달려 벼락을 맞아 죽는다.

잔혹한 단테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 ‘흑란’이라 불리는 ‘피에트로’뿐이다. 난봉꾼에 검술의 대가, 변장의 달인인 그는 풍기문란죄로 카사노바와 함께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가 일 디아볼로 혹은 루시퍼라 불리는 범인을 잡겠다는 조건으로 풀려난다. ‘피에트로’의 행적은 실제 단테의 바이오그래피와 유사하다. 단테에게 베아트리체가 있다면, 피에트로에겐 안나 산타마리아가 있다. 단테가 피렌체 100인 위원회의 위원이었다는 사실, 당시 흑당과 백당으로 갈라진 정치판에서 희생되어 피렌체에서 추방당했다는 사실은 피에트로가 10인 위원의 첩보원으로 활약하다가 베네치아 공화국의 근간을 뒤흔드는 음모에 빠진다는 허구로 연결된다.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소설가들에게 팩션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단테의 ‘신곡’은 그 자체로 팩션적이다. ‘지옥편’의 제1옥에서는 호메로스, 오비디우스, 소크라테스, 세네카 등 고대 문학가와 철학자들이 부활하여 당시 이탈리아의 정치와 현실에 대해 일침을 가한다. 물론 21세기형 단테인 피에트로는 더는 정적으로 존재의 이유를 사유하진 않는다. 그 대신 공간을 활보하면서 오디세이식 모험을 즐기고 과정 추론적인 방식을 통해서 사건을 해결한다. 추리와 모험을 미션으로 삼는 21세기형 팩션은 당분간 끊임없이 생산되고 소비될 것으로 보인다.

한혜원 계원조형예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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