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잃어버린 유년의 추억… ‘신들은 바다로 떠났다’

  • 입력 2007년 5월 12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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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들은 바다로 떠났다/존 반빌 지음·정영목 옮김/272쪽·9000원·랜덤하우스

‘그들은, 신들은 떠났다.’

이 책은 이 아름답고 모호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휙휙 넘어가는 소설에 익숙해진 독자들은 당혹스러울 것이다. ‘새들은 가냘프게 울면서 급강하했다.

거대한 사발에 담긴 듯한 물이 수포처럼 부풀며, 납빛을 띤 푸르스름한 악의를 번적거리는 광경에도 기가 죽지 않은 것 같았다’ 같은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지금 읽는 것이 소설인지 시인지 혼란마저 느껴진다.

이 책은 영국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부커상 수상작(2005년)이다. ‘현존하는 최고의 언어 마법사’라는 언론의 찬사답게, 아일랜드 작가 존 반빌은 소설 첫 장부터 숨 막히게 아름다운 문장을 이어간다.

얼마 전 아내를 잃은 맥스 모든은 어린 시절 여름을 보냈던 바닷가 마을의 ‘시더스’를 찾는다. ‘시더스’는 50년 전엔 부자들의 별장이었지만 지금은 낡아버렸다. ‘시더스’는 사실 맥스에겐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담긴 곳이다. 어린 맥스는 그곳에서 신처럼 보였던 부유한 그레이스 가족을 만났다.

이 이야기는 기억에 관한 것이다. 저자 반빌은 한 번 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거듭 읽고 기억해야 하는 문장들을 통해서 읽는 이에게 지나간 것들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소년 맥스의 가슴을 들뜨게 한 그레이스 부인. 그녀에게 접근하기 위해 맥스는 그레이스 부인의 쌍둥이 아들딸과 친밀하게 지낸다. 쌍둥이를 돌보는 보모 로즈와 그레이스 부인의 대화를 엿듣고 로즈가 그레이스 부인의 남편을 사랑한다고 짐작한 맥스는 쌍둥이에게 이 얘기를 전한다.

얘기를 들은 쌍둥이는 폭풍우 치는 날 바다에 나가선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이 사건은 맥스에게 엄청난 충격과 큰 상처를 준다. 성인이 된 맥스가 돌아보는 과거는 쓸쓸하고 애잔하다.

시적인 문장을 끈기 있게 읽다 보면 누구나 갖고 있을 유년의 상처가 떠오른다. 삶이란 ‘투쟁, 지칠 줄 모르는 행동과 의지’여야 하지만 때로 ‘자궁 같은 따스함’을 주는 게 과거의 기억이다. 정련된 아름다운 언어로 만든 과거의 풍경화를 그려내면서 작가는 조용히 메시지를 전달한다. 현재는 바로 그 과거들이 쌓인 끝 지점이라는 것.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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