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속의 별]세상의 조연되어 모성으로 빛나는 나문희

  • 입력 2007년 5월 11일 20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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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나문희. 동아일보 자료사진
배우 나문희. 동아일보 자료사진
가수 장윤정. 동아일보 자료사진
가수 장윤정. 동아일보 자료사진
난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주연보다 조연을 유심히 관찰하는 버릇이 있다. 얼마 전 뮤지컬 스타일로 진행된 '태양의 서커스 퀴담'을 보러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 관객들이 원형 무대 속 주인공들에게 시선을 고정시켰겠지만 난 하찮은 동작 하나에도 최선을 다하는 조연들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속에는 주연들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열정과 진지함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내 마음 속의 별' 요청이 들어왔을 때 중견배우 나문희 선생님이 생각났다. 그 분과 동시대를 살지 않았을 뿐더러 연기자도 아닌 내가 그 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한다는 것이 경솔해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 분을 좋아하는 것 중의 하나는 바로 조연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평범하고 서민답지만 왠지 모를 흐뭇함이 담겨있다고 해야 할까.

나문희 선생님을 처음 본 건 12년 전 KBS 일일연속극 '바람은 불어도'에서였다. 당시 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나는 비평준화 지역인 경기 오산에서 학교를 다녔고 수원의 명문고에 진학하는 것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했다. 입시 경쟁의 건조한 삶에서 유일한 낙은 TV 드라마 시청. 그러던 중 '바람은 불어도'를 보게 됐고 약간은 못 된, 억척스러운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배우 나문희. 그 때만 해도 그냥 이름만 아는 정도였다.

그 분에게 본격적으로 관심을 쏟은 것은 내가 가수가 된 뒤였다. 우연히 이동 차량 안에서 KBS 드라마 '소문난 칠공주'를 봤는데 "돌리고 돌리고"하며 나문희 선생님이 즐겁게 트로트를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거의 10년 만에 TV로 만났는데 왜 그렇게 웃음이 나오던지. 늘 바쁘기만 한 나에게 그 웃음은 안식 그 자체였다.

최근 MBC 일일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을 본 뒤 본격적으로 팬을 자처했다. 다소 시대에 뒤떨어진 할머니 역을 맡은 나문희 선생님은 10대들에겐 그저 '웃긴 할머니' 정도일지 모른다. 그러나 휴대전화기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전화기를 줄에 매달아 목에 걸고, 김치전을 젓가락 대신 손으로 찢어 자식들에게 먹이는 모습은 우리 엄마 같기도 하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유년시절, 엄마는 늘 집에서 조끼를 입고 있었고 각종 옷을 겹겹이 껴입었다. 그 때는 이해가 안 됐지만 가난하면 더 억척스러워진다고, 난방비 줄여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엄마의 심경을 이제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시트콤 속 나문희 선생님 모습처럼…. 왜 그토록 고기 먹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는지 가난을 겪지 못하면 절대로 알지 못할 일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차 문을 열고 팬들을 만날 때면 웃어야 하는 게 연예인이다. 단 한 번의 힘든 내색도 용납이 안 된다. 한 번은 엄마를 만나자마자 참았던 설움이 한꺼번에 터져 엉엉 운 적이 있다. 그런데 엄마는 내가 우는 이유를 묻지도 않고 그냥 울게 놔뒀다. 다 울고 내가 진정이 된 후에야 걱정스럽게 말을 건네셨다. 그것도 내가 힘들까봐 일부러 밝고 친근하게. 난 그 때 비로소 느꼈다. 모성애는 '무조건'이라고. 나문희 선생님이 영화 '열혈남아'에서 보여준 가슴 찡한 자식 사랑처럼 말이다.

나문희 선생님은 서민적이다.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 듯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배우다. 그것은 어쩌면 내가 지향해야할 모습이기도 하다. 데뷔 초만 해도 내 노래가 가볍고 상업적이며 음악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배부를' 정도로 들었다. 하지만 난 서민들 곁에서 그들이 즐길 수 있는 '그들의' 음악을 하고 싶다. 마치 흰 도화지 같은 음악 말이다. 색깔이 진한 도화지는 개성이 강해 금방 눈에 띄지만 그것 뿐 다른 색을 섞을 수가 없다. 어떤 색을 칠해도 발색이 되는 흰 도화지. 바로 나문희 선생님처럼 말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얼마 전 길에서 처음만난 아줌마 아저씨들이 나에게 "윤정아, 너 살 좀 쪄라"라며 마치 옆 집 여동생처럼 엉덩이를 두들겨 주셨다는 것.

하지만 이렇게 얘기해도 여전히 난 나문희 선생님 앞에 설 엄두가 나지 않는다. 지금이야 신세대 트로트 가수들이 많아졌지만 내가 데뷔할 때만 해도 나처럼 나이 어린 가수가 없었기에 2년 가까이 선배님들이 계신 대기실에는 들어가지도 못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선배님들의 '기'가 무서웠기 때문이다. 대선배이신 나문희 선생님에게도 무시무시한 기가 존재할 것 같아 두렵다. 그래도 이번 기회를 통해 만나 뵙는다면 내 디너쇼에 꼭 초대하고 싶다. 그리고 그 분을 향해 무대에서 이렇게 외치고 싶다.

"'어머니'하면 맨 먼저 생각나는 연기자가 당신인 것처럼 저도 '트로트 가수'하면 떠오르는 가수가 되고 싶습니다. 저도 언젠간 관객들에게 선생님처럼 가슴 찡한 모습을 보이고 싶은데… 과연 그럴 수 있을지 평가해주세요"라고. 마치 '태양의 서커스 퀴담'의 조연 같은 그 분에게….

장윤정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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