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제균]꼬마 스파이

  • 입력 2007년 5월 11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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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1871) 당시 프로이센군에 포위된 파리.

작은 공원의 관리인인 퇴역 해군 출신 스텐 씨에게는 열 살 남짓한 외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 아들이 거리의 아이의 꾐에 빠져 프로이센 진영에 신문을 팔러 나선다. 은화 몇 프랑을 챙기기 위해서였다.

두 아이는 ‘감자를 주우러 간다’며 프랑스 의용군의 방어선을 통과하던 중 ‘오늘 밤 프로이센군을 친다’는 얘기를 듣는다. 프로이센 진영에 간 거리의 아이는 이 정보를 흘리고, 은화를 받는다.

은화를 나눠 받고 파리로 돌아온 아이는 죄책감에 시달리다 귀가한 스텐 씨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얘기를 들은 그는 “내가 놈들에게 이걸 돌려주겠다”며 은화를 갖고 집을 나선다. 전선으로 향하는 기동부대에 합류한 스텐 씨를 본 사람은 그 뒤로 아무도 없었다.

알퐁스 도데의 단편소설 ‘꼬마 스파이(L'enfant espion)’의 줄거리다. 프랑스인의 애국심을 강조하는 소설이지만, 저변에 서구인의 책임의식이 깔려 있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자신이나 가족, 자기가 속한 조직이 잘못을 저질렀으면 반드시 책임져야 한다는.

파리특파원 초기 이해되지 않았던 교통문화가 접촉사고 등의 현장에서 양 당사자가 작성하는 일종의 ‘사고보고서’였다. 사고 상황을 기술하고, 간단한 사고 개요도까지 그리는 이 보고서는 이후 사고처리 과정에서 법적 효력을 갖는다.

특기할 만한 점은 경찰 개입 없이 양자가 공동으로 작성한다는 것. 프랑스어 가정교사에게 “그러면 서로 주장이 달라 보고서 작성이 어렵겠다”고 했더니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지려는 의식이 ‘사고 나면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자조가 나오는 한국과 달리 ‘조용한’ 사고 처리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한국의 사고 현장에서 당사자들이 이런 보고서를 작성한다면 어떨지….

서구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무책임의 극치가 작금의 한국 대선정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지난달 4·25 재·보궐선거 때는 실정(失政) 책임을 물을 열린우리당 후보가 보이지 않아 유권자들을 황당하게 하더니 최근에는 당을 떠난 대통령과 현직을 떠난 당의장 출신들이 열린우리당의 진로를 두고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다.

정동영, 김근태 전 의장은 실패 책임론이 따라다니는 당의 해체가 정치적 살길이고, 노무현 대통령은 열린우리당이 사라지면 기댈 정치세력이 분해되기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열린우리당 ‘사고’의 원인을 제공한 이들이야말로 함께 ‘사고보고서’라도 작성한 뒤에야 사고 처리 방향을 말할 자격이 있는 건 아닐까.

한나라당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박근혜 전 대표 측이 벌이는 경선 룰 싸움도 유권자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무책임한 행태가 아닐 수 없다. 이들이 경선 룰에 사활을 거는 데는 경선만 이기면 대선은 ‘떼어 놓은 당상’이란 판단이 깔려 있는 것 같다.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실패에 따른 반사이익을 누려 온 두 주자는 그 반사이익이 사라진 4·25 재·보선 한나라당 참패의 책임을 무겁게 느낄 때다. 대선에서도 실정 책임을 물을 후보가 없는 상황이 재연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기에.

정치권을 비롯해 곳곳에서 난무하는 무책임과 발뺌, ‘네 탓이오’가 사라지지 않는 한 대선에서 누가 되든 선진국은 어림없다.

박제균 정치부 차장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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