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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의 비극, 웃음만이 치유제”… 이르지 멘젤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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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의 비극, 웃음만이 치유제”… 이르지 멘젤 인터뷰

입력 2007-05-10 03:01수정 2009-09-27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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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으로서 가장 행복할 때가 언제냐고? 음∼ 영화를 안 찍을 때죠.”

칠순을 목전에 둔 이르지 멘젤(69·사진) 감독은 ‘체코영화의 거장’이란 호칭이 무색할 정도로 장난꾸러기 같았다. 팬들과 기념사진을 찍을 때 혀를 불쑥 내밀기 일쑤였고 20대의 아내를 대동해 놓고도 한국 여자들은 친절하고 사랑스럽기 이를 데 없다고 너스레를 떨기 바빴다.

전주영화제 심사위원장으로 한국을 찾은 그는 28세의 나이에 ‘가까이서 본 기차’로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며 체코영화를 세계에 알린 체코영화계의 전설적 존재다. 3년 뒤 ‘프라하의 봄’을 맞아 발표했던 ‘줄 위의 종달새’는 소련의 탱크에 짓밟히며 개봉 즉시 상영 금지 처분을 받았지만 21년 뒤인 1990년 ‘뮤직박스’와 함께 베를린영화제 금곰상을 수상하며 그를 세계영화계의 입지전적 인물로 부활하게 했다. 또 그는 지난해 ‘체코의 국민작가’ 보후밀 흐라발(1914∼1997)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나는 영국왕을 모셨다’로 베를린영화제 국제평론가상을 수상하는 노익장을 과시했다. ‘가까이서 본 기차’와 ‘줄 위의 종달새’도 흐라발의 소설이 원작이다.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그의 작품이 10일부터 서울 종로구 신문로 씨네큐브 광화문에서 열리는 특별전을 통해 일반에 공개된다. 희비극의 대가로 불리는 그의 작품은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주제를 휴머니즘 가득한 웃음으로 풀어낸다. 흐라발-멘젤 콤비는 이청준-임권택의 팀워크를 연상시킬 만큼 각자 국가의 비극적 역사 속에서 발효된 민족성을 탁월하게 담아낸다. 그러나 후자가 한국적 ‘한의 정서’를 비극적으로 포착한다면 전자는 아무리 비극적인 상황이라도 한바탕 웃음의 난장으로 펼쳐 낸다.

“어리석음은 나쁜 것보다 더 나빠요. 그런 어리석음을 고발하려면 정색하고 논쟁을 펼쳐선 안 됩니다. 그건 그 어리석음을 우리와 대등한 존재로 격상시켜 주기 때문이죠. 어리석음엔 농담으로 대응해야 해요. 그래야 어리석음보다 더 위에 있을 수 있으니까요.”

‘줄 위의 종달새’는 사회주의적이자 자본주의의 독소라는 모욕 속에 강제노역에 처해진 부르주아의 시선으로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사회주의체제를 조롱한다. 그들은 6·25전쟁과 관련해 ‘미 제국주의자들은 부산 바다에 빠져 죽어라’는 구호를 거부하며 “도대체 진실이 뭔지 알기냐 하느냐”고 반문한다. 그들 중에서 정의를 외치는 목수, 인간애를 강조하는 교수, 그리고 사랑을 믿는 주인공이 체제를 비판하는 바른말을 하다가 차례로 사라진다. 그들은 영화 마지막 ‘아오지 탄광’에서 만난다.

같은 사회주의 체제면서도 북한에선 상상도 못할 이런 반공주의 영화를 만들었다가 20년간 창작활동을 접어야 했던 멘젤 감독은 망명을 거부하고 묵묵히 체코를 지켰다.

“모두가 도망을 갈 순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내 영화에서 이념을 비판하는 무기는 바로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는 구체적 삶이었어요. 그걸 버리고 망명을 한다면 내겐 뭐가 남겠어요.”

‘가까이서 본 기차’는 조루증으로 자살 기도까지 하던 주인공이 그 치료를 위해 나이 든 여성을 찾아 헤매는 장면이 나온다. 극장에 걸린 지 일주일 만에 흥행 여부로 영화를 판단하는 요즘 젊은 영화관객의 ‘조루증’에 그의 영화야말로 ‘나이 든 여성’과 같은 치유제가 아닐까. 멘젤 감독은 이런 기자의 질문에 “그거야말로 큰 영광”이라며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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