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96년 英광우병 여파 소 8만마리 도살

  • 입력 2007년 5월 3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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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세상은 장밋빛에 취해 있었다.

드디어 달까지 찾아간 인간. 스스로 이뤄 낸 진보에 뿌듯해했다. 과학에 대한 맹신은 거만함으로 이어졌다. 미국의 윌리엄 스튜어트 공중위생국장은 호언했다. “이제 전염병의 시대는 갔다.”

권불십년(權不十年). 가슴이 아닌 땅을 치는 후회는 금세 찾아왔다. 10년쯤 뒤부터 더욱 강력한 전염병이 줄을 선다. “물질적 안락만 추구한 인간에게 신의 징벌이 내렸다.”(뤼슈롄 대만 부총통)

자연이 신이라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여러 전염병이 자연, 즉 동물에서 비롯됐다. 선두는 1980년대 초반의 에이즈 바이러스. 영화 ‘혹성탈출’의 계시인가. 아프리카 녹색원숭이가 숙주(宿主)였다. 말레이시아 니파바이러스는 돼지에서 나왔고, 가금류는 조류인플루엔자를 몰고 왔다.

최고의 충격은 광우병이었다. 1986년 첫 발견 땐 그저 ‘미친 소(mad cow)’이려니 생각했다. 난폭해져 날뛰다가 부들부들 떨더니 픽하고 쓰러졌다. 뇌에 구멍이 뻥 뚫렸다. 머리가 문제니 고기는 상관없다고 여긴 인간은 쇠고기 섭취를 줄이지 않았다.

사람에게도 옮는 징후가 공식 제기된 건 1996년. 영국 정부는 그해 3월 쇠고기가 인간 광우병을 유발할 가능성을 발표했다. 중추신경계를 침범해 치매와 신경마비를 일으키는 ‘야곱병’의 존재가 드러났다.

유럽은 공황에 빠졌다. 축산업은 물론이고 산업 전체가 흔들렸다. 소뼈로 만든 화장품, 소에서 추출한 젤라틴 약용 캡슐은 독극물로 전락했다. 1996년 5월 3일 결국 영국은 8만 마리의 사육소를 도살한다. 소의 홀로코스트였다.

광우병은 다름 아닌 소로 인한 질병이기에 충격이 컸다. 모든 면에서 사람에게 소중한 존재. 땅을 일구는 일꾼이자 추위를 막는 방패였다. 털 하나도 버릴 게 없었다. 가족이되팔 수 있고, 친구지만 먹을 수 있었다.

원인은 마지노선을 지키지 않은 인간이었다. 초식동물인 소에게 동족을 빻은 동물성 사료를 억지로 먹였다. 부작용이 빈번한 항생제를 주사했다. 빨리 살찌우고 더 많이 우유를 짜내려고. 섭리대로 풀을 뜯게 한 북유럽엔 광우병이 없었다.

“우리가 자연을 함부로 바꿨지만 이제 자연도 우리를 바꾸려 할 것이다.”(영화 ‘가타카’ 중에서) 원칙 없이 쌓은 바벨탑은 인간을 깔아뭉갠다. 천천히, 그리고 모조리.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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