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 “요즘 정치는 기본도 원칙도 대의도 없다”

  • 입력 2007년 5월 2일 16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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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자료사진
노무현 대통령은 2일 “요즈음 지도자가 되겠다는 분들의 행보를 보면 어쩐지 가슴이 꽉 막히는 느낌이 든다. 정치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기본도 원칙도 대의도 없어 보인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브리핑에 ‘정치, 이렇게 가선 안 됩니다, 한국정치 발전을 위한 대통령의 고언’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노 대통령은 “최근 우리 정치에서 여-야의 질서, 가치와 신념에 대한 믿음, 정치신의에 따른 도리, 국가와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 등이 모두 실종된 느낌”이라며 “오로지 대선 승리와 국회의원 선거만을 계산한 얄팍한 처신이 정치판을 지배하고, 격돌과 이합집산의 변화무쌍을 지켜보며 안타까운 심정을 금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노 대통령은 “정치가 이렇게 가서는 안 된다는 마음에 걱정이 태산”이라며 “저의 유불리 및 득실과 관계되지 않지만 한국정치가 다시 불신과 증오의 늪에 빠져 퇴행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에서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고자 한다”고 글을 쓴 이유를 밝혔다.

청와대측은 이 글은 노 대통령이 최근의 우리 정치상황을 지켜보면서 4월23일과 27일에 직접 작성해 비서실에 검토를 지시한 것으로, 한국정치의 발전을 바라는 마음에서 게재한다고 밝혔다.

조창현 동아닷컴 기자 cch@donga.com

다음은 노무현 대통령의 글 전문

이 글은 최근 우리 정치상황을 지켜보면서, 한국정치의 발전에 대한 우려의 심경과 제언을 담아 대통령이 직접 작성한 것입니다. ‘정치지도자’에 대한 글은 지난 4월23일 작성했고, ‘정당’에 대한 글은 재보선 직후인 지난 4월27일 작성해 비서실에 검토 지시를 한 것입니다. 두 편의 글 모두 한국정치 발전을 바라는 정치 지도자의 솔직한 고언 성격이어서 함께 묶어 게재합니다. - 편집자 -

최근의 우리 정치를 보면 가슴이 답답합니다. 기본도 없고, 원칙도 없고, 대의도 없는 듯이 보입니다. 여-야의 질서, 가치와 신념에 대한 믿음, 정치신의에 따른 도리, 국가와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 등이 모두 실종된 느낌입니다. 오로지 대선 승리와 국회의원 선거만을 계산한 얄팍한 처신이 정치판을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격돌과 이합집산의 변화무쌍을 지켜보며 안타까운 심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정치가 이렇게 가서는 안 된다는 마음에 걱정이 태산입니다. 저에게 유불리도 없고 득실과 관계되는 일도 아니지만, 한국정치가 다시 불신과 증오의 늪에 빠져 퇴행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에서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정치지도자, 결단과 투신이 중요합니다>

요즈음 지도자가 되겠다고 하는 분들의 행보를 보면 어쩐지 가슴이 꽉 막히는 느낌이 듭니다. 정치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치는 정치답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도 대통령이 되기까지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제가 직접 겪은 경험, 이전 지도자들의 경험에 비추어 정치다운 정치를 위한 몇 가지 생각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주위를 기웃거리지 말고 과감하게 투신해야 합니다. 권력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든, 헌신과 봉사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든 마찬가지입니다. 권력의 자리든, 지도자의 자리든 둘 다 그리 만만한 자리는 아닙니다. 평생을 걸고 죽을 힘을 다한다고 그냥 되는 일이 아닙니다. 하늘이 도와야 하는 자리입니다. 나섰다가 안 되면 망신스러울 것 같으니 한 발만 슬쩍 걸쳐놓고, 이 눈치 저 눈치 살피다가 될성 싶으면 나서고 아닐성 싶으면 발을 빼겠다는 자세로는 결코 될 수 없습니다.

저울과 계산기일랑 미련 없이 버려야 합니다. 정치는 남으면 하고 안 남으면 안 하는 ‘장사’가 아닙니다. 공익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일입니다. 대가를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라 그 자체로 보람을 찾아야 하는 일입니다. 먼저 헌신하고, 결과는 그 다음에 따라 오는 것입니다.

소신을 말해야 합니다. 무엇을 이루려 하는지 뜻하는 바를 국민앞에 분명하게 밝혀야 합니다. 나라를 위해 이루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 무엇이고, 어떻게 이룰 것인지를 분명하게 밝혀 국민의 선택을 받아야 합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날 시대정신이 무엇이고, 우리가 도전하고 해결해야 할 역사적 과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가 중요할 것입니다. 지나온 인생 역정을 투명하게 밝히고 왜 자기가 비전을 이루는 데 적절한 사람인지를 설명해야 합니다. 잘못한 일은 솔직히 밝히고, 남의 재산을 빼앗아 깔고 앉아 있는 것이 있으면 돌려주고, 국민의 지지를 호소해야 합니다.

자신의 소신과 정책을 말해야 합니다. 반사적 이익만으로 정치를 하려고 해선 안 됩니다. 대통령의 낮은 인기를 바탕으로 가만히 앉아서 덕을 본 사람도 있었고, 너도 나도 대통령을 몰아붙이면 지지가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해서 대통령 흔들기에 몰두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국민의 지지를 오래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의 정치적 자산이 필요합니다. ‘경제가 나쁘다’ ‘민생이 어렵다’ 이렇게만 말하는 것은 정책이 아닙니다. 아무 대안도 말하지 않고 국민들의 불만에 편승하려 하거나, 우물우물 국민들의 오해와 착각을 이용하려고 하는 것은 소신도 아니고 대안도 아닙니다.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분은 정당에 들어가야 합니다. 정치는 개인이 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이 하는 것입니다. 책임정치의 주체도 개인이 아니라 정당입니다. 거저 먹으려 하거나 무임승차를 해서는 안됩니다. 먼저 헌신해서 기여하고 이를 축적해 지도자의 자격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이미 있는 당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당을 만들거나, 당이 갈라져 있어서 곤란하다 싶으면 당을 합치는 데 기여하거나, 당이 합쳐지지 않으면 스스로 후보 단일화를 이루어 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 당이 통합하여 자리를 정리해 놓고 모시러 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닙니다. 현대의 정치는 군왕의 정치가 아닙니다. 오늘 날 민주주의에 삼고초려 같은 것은 없습니다.

또한 경선을 회피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민주주의 원리와 규칙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경선에 불리하다고 해서 당을 뛰쳐 나가는 것이나, 경선판도가 불확실하다고 해서 당 주변을 기웃거리기만 하는 것 모두가 경선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비칩니다. 역시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이 할 일은 아닙니다.

정치는 공익을 추구하는 일입니다. 공익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우고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치적 이익만을 셈하여 정치를 해서는 안됩니다. 정치는 정정당당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본질입니다. 민주주의는 마치 운동경기와 같이 규칙으로 하는 것입니다. 국민이 심판입니다. 투명하고 알기 쉽게 해야 합니다. 복잡한 정략과 권모 술수로 국민의 판단을 흐리게 해서는 안됩니다. 콩이면 콩, 팥이면 팥이지요. 애매하고 혼란스럽게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정당, 가치와 노선이 중요합니다>

4·25 재·보궐 선거를 둘러싸고 납득하기 어려운 평가와 해석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정치현상에 대한 개념규정이나 평가가 잘못되면 정치가 왜곡됩니다.

먼저, 왜 한나라당의 참패라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진 세 곳 중 지역성이 강한 두 곳에서는 각기 특정지역에 기반을 둔 정당이 승리하고, 지역성이 강하지 않은 곳에서는 한나라당이 이겼습니다.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과 국민중심당 후보, 그리고 지방선거의 무소속 당선자들은 한나라당과 전국적 차원의 경쟁구도를 형성하지 않았습니다. 정치의 큰 판으로 보면 한나라당은 경기도 화성에서 이겼으니 참패한 선거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한나라당이 전국 모든 선거를 석권하지 못했다고 해서 이를 ‘참패’라고 하는 것을 보면, 언제부터인가 한나라당이 ‘대한민국 유일당’이 되기라도 한 모양입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전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고, 걱정스러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히려 열린우리당의 사실상 패배라고 볼 수 있는 측면이 간과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당은 경기도 화성에서 졌습니다. 다른 지역에선 쌍방간의 합의에 근거한 연대인지 일방적인 연대인지 알 수 없지만, 연대를 한다며 후보도 내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막상 당선된 사람들은 열린우리당을 우습게 대하니 그야말로 쓰라린 패배를 맛 본 것입니다. 대의도 없고 실속도 없는 연대를 한 것이 선거에서 참패한 것보다 정치적으로 더 큰 패배일 것입니다.

선거 후유증을 겪는 한나라당 처지를 덮어주기 위해서이거나, 비껴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열린우리당 상황을 일방적으로 책망하려는 게 아닙니다. 우리 정치권이 본질을 솔직하게 봐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게 국민들 앞에 책임 있는 모습입니다.

현재 열린우리당은 4·25 재·보궐 선거의 책임을 물을 대상조차 모호한, 기이한 처지에 빠져 있습니다. 책임이 가장 크다고 할 대통령은 이미 당에 없으니 대통령 책임을 들고 나오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당 지도부는 곤경에 빠진 정당을 수습하기 위해 억지로 짐을 진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당 한쪽에서는 통합 아니면 당을 나가겠다고 하는 마당에 일방적인 연대라도 안할 수 없었을 것이니 그들에게 책임을 묻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책임을 따진다면 이미 당을 깨고 나간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또 당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도 여전히 ‘통합노래’를 부르며 떠날 명분을 만들어 놓고 당을 나갈지 말지 저울질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책임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당장 당이 깨질 판이니, 책임 이야기는 꺼낼 형편도 아닙니다. 마치 솔로몬 재판에서 아기를 내 준 어머니와 같은 심정으로 말을 아끼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정치, 참 어려운 일입니다.

저는 비록 당적을 정리했지만, 열린우리당이 지금 처해 있는 난관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것은 정치상황과 맞물려 중요한 문제입니다. 대통령 선거에서 각 정치세력이 기본을 갖춘 조직을 형성해 건전하게 맞서는 구도가 형성돼야 수준 높은 정책대결이 가능합니다. 그 이전에, 산적해 있는 민생법안 개혁법안이 표류하고 있는 것도 한나라당을 견제할 정치세력의 부재에서 기인한 측면이 큽니다. 그래서 드리는 제언입니다.

현재 당 상황이든 재·보궐 선거의 책임이든, 분석이 정확해야 합니다. 진단이 정확해야 적절한 처방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분석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책입니다. 대책 중에서 가장 중요한 대책은 기본을 지키는 것입니다. 끈기 있게 기초체력과 기량을 연마하는 것입니다. 기본이 있어야 전략이 있습니다. 기본이 없으면 전략도 소용이 없습니다.

가장 나쁜 대책은 서로 책임을 미루고 싸우는 것입니다. 운동선수들은 한 번 졌다고 그대로 주저앉지 않습니다. 다시 시작합니다. 패배의 원인을 분석하고, 다시 체력을 보강하고, 기량을 연마합니다. 그 중에서도 원인의 분석보다는 이후의 훈련에 주력합니다. 책임을 따지고 싸우는 일은 여간해서 하지 않습니다. 결정적인 잘못이 있고 더 좋은 대안이 있을 때에만 합니다.

5년 전 민주당은 지방선거와 보궐선거에서 패배하자, 패배감에 빠진 당의 주류라는 사람들이 민주주의 원칙을 팽개치고 정체성도 가능성도 모호한 다른 후보와 접촉하면서 자기들이 선출한 당의 후보를 흔들었습니다. 승리에 급급하여 한 일이겠지만 자칫 그 때문에 승리를 놓칠 뻔 했습니다. 분석도 대책도 다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열린우리당은 2년 전 보궐선거에서 패배한 후 결과에 대한 책임을 놓고 당이 시끄러웠습니다. 대통령이 공격을 당하고 지도부가 교체되었습니다. 1년 전 지방선거에서 패배한 이후에도 그랬습니다. 이번에는 아예 당을 깨자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었습니다. 말로는 통합을 내세웠으나 실은 당을 깨고 정치구도를 지역으로 재편하여 살길을 찾자는 주장이었습니다. 대선 승리를 위한 것이라고 내세웠으나 대선이 목적이라면 당을 합치지 않고도 후보 간 연대가 가능한 일이니 굳이 당을 깨자고 할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통합에 대한 아무런 전망도 없이 당부터 깨자고 한 것을 보면 각자 살길을 찾자는 속셈이 아니었는가 싶습니다.

어떻든 열린우리당으로 당선된 사람들이 열린우리당의 창당 정신을 포기한 것입니다. 열린우리당은 지역 간 대결을 극복하고 전국에서 경쟁이 있는 정치를 하자는 뜻으로 세운 정당입니다. 지역 간 대결만 있는 국회는 정책에 의한 정치를 불가능하게 하고, 정당 간 경쟁 없이 안방에서 손쉽게 당선되는 선거는 정치를 부패와 독선에 빠뜨리기 때문입니다.

지금 열린우리당은 심각한 위기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창당시의 대의와 결단에 비추어 보면 너무나 참담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열린우리당의 연이은 패배 책임은 대통령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 당이 책임을 놓고 그렇게 싸우지만 않았더라면, 어렵더라도 신념을 가지고 끈기 있게 국민을 설득해 왔더라면, 비록 선거에서 이기지는 못했을지라도 당의 존립 자체가 표류하는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또한 잘못된 진단과 처방의 결과입니다. 기본을 소홀히 한 결과입니다. 지금부터라도 기본을 바로잡고 다질 때입니다.

이해관계에 몰두하는 정치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정치의 기본은 원칙과 대의입니다. 정치에서 후보보다 중요한 게 정당입니다. 정당은 정체성과 가치를 함께하는 사람들이 신념으로 뭉친 집단입니다. 정당은 원칙과 대의에 따라 행동해야 국민들의 신뢰를 쌓아갈 수 있습니다.

지역주의에 기대려는 정치는 상생과 통합이 아니라 대결과 분열의 정치이며, 민주주의를 후퇴시킵니다. 나라와 국민의 미래를 위한 책임있는 행동보다 당부터 깨고 보자는 것은 창조의 정치가 아니라 파괴의 정치입니다. 가치와 노선보다 정치인의 이해관계에 몰두하는 정치는 선거에서도 역사에서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2007년 4월

대 통 령 노 무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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