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성호]창밖 풍경, 그 개헌의 지정학

  • 입력 2007년 5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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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시작도 봉합도 잘못된” 개헌 논의였지만 일단 끝난 것은 환영할 일이다. 그런데 환영하는 마음이 개운하지 못하다. 개헌 논의의 끝이 지금 여기가 아님을 느끼기 때문이다. 18대 국회에서 논의를 재개하겠다는 시한부 정당들의 공허한 협약(協約) 따위는 관심 밖이다. 그 께끄름한 마음은 ‘집안 사정’보다는 ‘창밖 풍경’에서 기인하는 바가 더 크다.

그 ‘창밖 풍경’을 여기 다 그릴 수는 없다. 그러나 최근 신문 보도만으로도 점묘(點描)는 가능하다.

올해 1월 26일 대만의 천수이볜 총통은 ‘세계신흥민주포럼’ 연설을 통해 독립개헌을 넘어 신헌법 제정을 공언하고 나섰다. 국호와 국기의 변경까지 담은 최근 제헌 구상의 목표는 중국에 의한 흡수통일을 막기 위해 대만 주권의 보장을 만국공법(萬國公法)의 돛대에 얽어매는 데 있다. 같은 연설에서 “대만 명의의 유엔 가입을 재추진하겠다”고 천 총통이 밝힌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제헌과 이에 대한 국제법적 승인을 통해 온전한 ‘독립국가’로 발돋움하겠다는 국가대계(國家大計)를 재천명한 것이다.

3월 16일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중국의 물권법(物權法)이 제10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통과되었다. 이번 법은 2004년 개정 헌법에서 인정된 사유재산권 보호를 위한 후속 조치이자 그 실천의 일환이다. 이로써 어정쩡한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개헌과 법 개정을 통해 좀 더 오롯한 시장경제로 또 한 발짝 다가섰다. 중국이 동아시아의 ‘패권국가’가 될 수 있는 경제적 뒷심도 그만큼 두둑해지게 되었다.

대만… 중국… 일본의 개헌 도미노

4월 13일 ‘국민투표법’이 중의원(衆議院)을 통과함으로써 일본의 평화헌법 개정을 위한 법제도적 정지작업은 이제 큰 고비를 넘어섰다. 이미 2005년도 일본 방위백서는 중국의 경제성장과 방위비 증대, 그리고 기존의 핵능력에 대해 “중대한 위협”이라고 적시하고 있다. 이러한 안보인식에 비추어 볼 때 교전권(交戰權)을 회복하고 유사시 중국 대만 양안(兩岸)에 합법적으로 출병(出兵)할 수 있는 ‘자위군(自衛軍)’이 어떤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될지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네들 표현대로 가헌(加憲)이건 창헌(創憲)이건 개헌을 통한 일본의 ‘보통국가’화를 추동하는 지정학(地政學)적 힘의 일단을 여기서 본다.

이 정도의 점묘만으로도 우리 처지를 깨닫고도 남는다. 대만과 일본의 개헌과 중국의 개헌이 지정학적으로 연동되어 있음을 직감한다. ‘독립국가’와 ‘보통국가’를 향한 동아시아의 ‘개헌 도미노’ 뒤에는 ‘패권국가’에 대한 우려가 짙게 깔려 있음을 실감한다. ‘창밖 풍경’이 이럴진대 우리라고 예외일 리 없다. 동북공정과 관련한 영토조항부터 황사문제를 둘러싼 환경권 조항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지정학은 새로운 헌법학을 요구하고 있다.

급변하는 지정학적 상황에서 대한민국 개헌의 처신은 어떠해야 하는가.

우선 ‘1987년 체제의 극복’과 같은 우물 안 정치관을 극복해야 한다. 적어도 ‘독립국가’나 ‘보통국가’의 웅지(雄志)와 견줄 만한 ‘통일국가’의 상상력 정도는 발휘할 필요가 있다. 통일의 초석(礎石)을 놓는 개헌을 통해 동아시아 민족국가 체제를 완성하는 종석(宗石)이 되겠다는 더 큰 야망을 펴봄 직도 하다. 정녕 개헌이 필요하고 다급하다면 그 이유는 방 안이 아니라 창 밖에 있다.

하지만 개헌의 꿈이 원대한 만큼 그 행보는 더욱 진중해야 한다. 작금의 관건이 겨우 권력구조의 재편이 아니라면, 그 정도의 이유로 개헌 논의의 뚜껑을 다시 열 수는 없다. 대한민국의 과거와 통일한국의 미래에 대한 국가적 합의가 전제되지 않은 섣부른 개헌 논의는 사회적 혼란과 이념적 갈등을 피할 수 없다. 지정학적 국가전략의 관점에서도 그런 개헌은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하다.

개헌을 개헌답게 할 역량 모아야

지금은 ‘개헌의 지정학’을 차분히 고민하는 동시에 우리 사회의 개헌역량을 가다듬는 데 힘을 집중할 때다. 그런 의미에서 성급했던 개헌 논의의 유보를 일단 환영한다. 그 뒤에는 경위야 어찌됐건 종국에는 자기 뜻을 접은 대통령의 쉽지 않은 결단이 있었음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다음번 개헌 논의를 주도할 차기 대선주자들에게 이렇게 주문한다.

‘창밖을 보라.’ ‘나라 밖을 보라.’ 그리하여 대선을 대선답게, 개헌을 개헌답게 하기를 신신당부하는 것이다.

김성호 객원논설위원·연세대 교수 sunghokim@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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