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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理知논술/영화, 생각의 보물창고]황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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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理知논술/영화, 생각의 보물창고]황산벌

입력 2007-05-01 03:01수정 2009-09-27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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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남기고픈 헛된 욕망이 전쟁 일으키죠

“머시기할 때까지 거시기한다!”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머시기? 거시기?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황산벌’의 핵심어는 다름 아닌 ‘거시기’입니다. 백제군이 사용하는 ‘거시기’란 단어의 의미를 두고 신라군이 혼란에 빠진다는 내용의 이 영화는 ‘왕의 남자’를 연출한 이준익 감독의 2003년 작입니다. 우스꽝스럽다고요? ‘황산벌’을 좌충우돌 코미디 정도로 평가 절하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이 영화엔 언어와 역사를 바라보는 빛나는 통찰력이 숨어 있거든요.

[1] 스토리라인

서기 660년. 신라와 연합한 당나라군이 백제를 치기 위해 덕물도 앞바다에 당도합니다. 그때 김유신(정진영)이 이끄는 신라군은 황산벌에서 계백(박중훈) 장군의 백제군 결사대와 마주칩니다.

그런데 김유신은 공격을 단행하지 못하고 주저합니다. 왜냐하면 백제군 진영에서 첩자들이 엿들은 계백 장군의 지령을 도무지 해석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죠. 계백은 중요한 대목마다 “거시기” “거시기”해 가며 명령을 내리는데, 신라군은 변화무쌍한 ‘거시기’의 의미를 가려내지 못해 혼란과 두려움에 빠졌던 것입니다.

심사숙고하던 김유신이 급기야 백제군에 대한 공격을 명하고, 계백장군은 장렬한 최후를 맞습니다.

[2] 핵심 콕콕 찌르기

계백이 즐겨 쓰는 말인 ‘거시기’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처럼 매번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우리의 전략전술적인 거시기는 한마디로 머시기할 때까지 갑옷을 거시기한다”고 할 때 ‘거시기’는 “갑옷을 옷에 꿰매어 절대로 벗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오늘 황산벌에서 아쌀허게 거시기혀불자” 할 때의 ‘거시기’는 “죽을 각오로 싸운다”는 뜻이죠.

‘거시기’로 대표되는 사투리는 알고 보면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언어란 특정시대, 특정지역 사람들이 공유하는 암호(code)란 사실이죠. ‘거시기’의 의미가 시도 때도 없이 바뀌어도 백제군은 귀신같이 그 뜻을 알아챕니다. 왜냐하면 백제군은 경험적으로 ‘거시기’가 사용되는 맥락(context)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여기서 언어란 우연히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 살게 된 사람들끼리 공유하게 된 계약이자 문화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신라군영에 잠입한 백제 첩자들(김승우 신현준)이 “조까 거시기해불제”라고 사투리를 썼다가 자신들의 정체가 대번에 들통 나는 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규정하고 또 남과 구별시키는 하나의 ‘정체성(identity)’인 것입니다.

[3] 종횡무진 생각하기

여러분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화랑 관창과 반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아마도 ‘무예와 용맹이 뛰어난 신라 화랑으로 어린 나이에 황산벌에서 장렬하게 산화한’ 인물들로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 둘을 다소 우스꽝스럽게 묘사합니다. 김유신의 동생인 김흠순 장군은 아들 반굴에게 “적진에 들어가 장렬하게 죽으라”고 강권하면서 이런 대화를 나눕니다.

“봐라 봐라, 가늘고 길게 산 인간치고 역사에 이름 남는 사람 있더나?”(김흠순) “아부지, 내는 길게 살고 싶다.”(반굴) “니 폼나게 죽으면 천 년을 산대이. 낼 믿으라카이. 먼저 가는 놈이 장땡이대이. 니는 반드시 뜬대이.”(김흠순)

물론 사실이 아닐 것입니다(역사 기록에는 반굴이 아버지의 말씀에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네” 하고 나가 숨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황산벌’은 이 장면을 통해 우리에게 실로 중요한 생각거리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바로 ‘역사의 기록이란 사실(fact)이되 진실(truth)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죠.

반굴이 스스로 목숨을 던진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가 죽은 건 100% 불타는 애국심과 충성심에서였을까요? 혹시 자신 혹은 가문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고자 하는 강렬한 명예욕에 그 스스로 희생된 건 아닐까요?

자기를 희생하기 위해 백제 진영을 찾아간 관창이 “나는 신라대왕 김춘추의 사위인 전 대야성주 김품석의 아우이신 현 신라 좌장군 김품일의 아들 화랑 관창이다”라면서 자신을 주저리주저리 소개하는 모습을 영화가 굳이 보여주는 이유도 같은 맥락입니다. 전쟁에서 일어나는 개인의 희생 뒤엔 늘 순수하고 아름다운 의도가 있으리라 확신할 수는 없다는 얘기지요.

[4] 알쏭달쏭 퀴즈

‘황산벌’에는 영화의 주제를 고스란히 함축하고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김유신과 계백이 만나 ‘인간 장기’를 두는 순간이죠. 땅 위에 그려진 커다란 장기판 위에 ‘인간 장기짝’이 되어 서 있는 신라와 백제 병사들. 이들은 두 장군의 명령에 따라 이리 움직이고 저리 움직입니다. 그 과정에서 창을 든 이들 병사는 서로 찌르고 찔리죠. 자, 이 ‘인간 장기’에는 어떤 속뜻이 숨어 있을까를 생각해 보는 것이 오늘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계백장군은 황산벌로 출정하기 전에 제 손으로 가족을 죽임으로써 결연한 의지를 다지고자 합니다. 계백은 마지막으로 가족에게 말합니다. “호랭이는 죽어서 꺼죽(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냄긴다고 혔다.”

이에 아내(김선아)는 이렇게 반박합니다. “호랭이는 가죽 땜시 디지고(죽고) 사람은 이름 땜시 디지는 거여, 인간아!”

그렇습니다. 역사에 제 이름을 남기고픈 인간의 세속적 욕망이 불필요한 전쟁과 불필요한 희생을 양산해 내는 건 아닐는지요. 어쩌면 역사는 김유신이나 계백 같은 이름난 영웅들의 것이 아니라, 최후까지 살아남는 백제 병사 ‘거시기’(이문식)처럼 이름 없는 민초들의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정답은 다음 동영상 강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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