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반병희]‘붉은 깃발’ 마력의 중독증

  • 입력 2006년 9월 11일 22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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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학교 선배의 상가를 찾았다.

상주가 고위 공직자 출신이어서인지 조문객 중 공무원이 많았다. 요즘 논란을 빚고 있는 정부합동감사에 대한 서울시의 반발이 화제에 올랐다.

서울시 국장급 공무원 A 씨가 말문을 열었다.

“오세훈 시장 체제가 출범한 지 2개월밖에 안 된다. 시의회 감사, 국회 국정감사, 감사원 감사가 줄줄이 예정돼 있어 업무를 보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중앙정부에 감사를 11월로 늦춰 달라고 했더니 감정적 반응만 보였다.”

감사는 위법 사항이 발생했을 때 이뤄져야 하는데도 중앙정부가 포괄적 업무감사를 강행하려는 것은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얘기였다. 서울시의 약점을 들춰내 야당 출신의 오 시장을 손보고, 서울시도 길들이는 일거양득(一擧兩得)의 계책이 아니냐는 것.

자리를 함께한 중앙부처의 고위 공무원 B 씨는 펄쩍 뛰었다. 이번 감사는 이미 2월에 일정이 잡혔던 것으로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정치적 의도가 개입될 여지가 전혀 없다는 반박이었다.

그러자 중소기업 사장인 C 씨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중앙정부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자치단체장이 갖고 있는 재산세율 조정권이나 도심주택개발 허가권을 빼앗아 오겠다고 협박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 강남 집값 안정이나 자립형사립고 설립 확대 반대 등 중앙정부가 개입해 잘된 일이 뭐가 있느냐.”

여러 조문객의 중앙정부 질타가 이어졌다.

기업 투자 의욕을 높이기 위해 출자총액제한제도를 폐지하겠다고 해놓고선 다른 한쪽에선 순환출자금지안을 도입하겠다는 것은 지자체는 물론 민간 기업까지 중앙정부 마음대로 흔들겠다는 의도가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왔다.

B 씨는 정책의 일관성과 효율성의 강조로 맞섰지만 설전이 거듭될수록 그의 설명은 군색해 보였다.

중앙정부의 지나친 규제가 기업의 발목을 잡고 성장을 늦춘 사례는 수없이 많다.

시장경제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영국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1865년 영국에선 ‘붉은 깃발법(Red Flag Act)’이란 희한한 법이 제정됐다. 마차가 55m 전방에서 붉은 깃발을 꽂고 달리면 자동차는 그 뒤를 따라가야 했다. 자동차의 최고 속도는 시속 6.4km로 제한됐고 도심지에서는 그나마 시속 3.2km로 속도를 줄여야 했다. 마차산업과 자동차산업의 균형 발전과 부의 균등한 분배를 위한다는 명분이었다. 이 법은 1890년대까지 지속되면서 영국 자동차산업의 발목을 잡았다. 결국 영국은 자동차산업의 주도권을 독일 등 이웃나라에 넘겨줘야 했다.

특정 이념에 편향된 정권은 규제만능주의에 빠지기 쉽다고 한다. 미국 해럴드 덤세츠 교수가 지적한 니르바나(Nirvana)적 정책 접근의 오류다. 고통과 번뇌에서 벗어난 이상 사회를 건설한다는 니르바나적 정책 접근은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니, 너에 대한 나의 간섭과 통제는 불가피하다’는 독선과 아집의 논리로 흐른다.

니르바나적 정책 접근에 익숙한 현 정권에 규제 완화를 기대하긴 아무래도 어려울 듯하다. 차라리 꼭 필요한 규제나 제대로 하라고 권하는 게 나을 성싶다.

국가의 근본을 무너뜨리기 위해 진짜 ‘붉은 깃발’을 흔들어 대는 친북 좌파의 불법 행위에 대한 규제라도 제대로 했으면 기업인들이 이렇게 불안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반병희 오피니언팀장 bbhe42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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