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순덕]필리핀 가정부

  • 입력 2006년 2월 28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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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선 일자리 찾기 힘들어요. 그냥 있으면 배만 고프죠.” 미국의 워싱턴포스트가 전한 필리핀 여성의 한탄이다. 해외고용센터 앞에서 세 시간이나 줄을 서 기다렸다는 그는 한국행을 원하고 있었다. 일자리가 없어 하루 2500명씩 떠나는 나라. 대학을 나온 전문직 여성들도 잘해야 보모, 아니면 가정부다. 그렇게 1000만 명이 벌어 보내는 돈이 필리핀을 먹여 살리고 있다. 국내총생산(GDP)의 12%, 연 수출액의 4분의 1인 막대한 금액이다.

▷20년 전 ‘피플 파워’로 들끓었던 마닐라 시의 에드사 대로(大路)는 지금 해외고용센터가 있는 곳으로 더 유명하다. 1986년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를 몰아낸 뒤의 희망과 자신감은 분노와 실망으로 바뀐 지 오래다. 2001년 또 한번 피플 파워가 부패한 대통령 조지프 에스트라다를 내쫓았지만 현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도 같은 혐의로 몰리고 있다. 이제 필리핀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바보 같은 짓’으로 여긴다고 외신들은 전한다. 부패나 부정선거보다 빈곤에 더 지쳐 있다는 것이다.

▷불안한 정정(政情)은 필리핀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1898년 재산 있는 사람에게만 선거권이 주어진 탓에 금권(金權)은 지역토호에게 집중됐다. 정치인들은 정당보다 리더에게 줄을 서지 국리민복(國利民福)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 선거비용을 뽑으려면 부패와 탈세는 필수다. 마르코스 축출 뒤 5년간 1000건의 법률을 만들었던 의회가 2001년부터 2004년까지는 고작 76건을 처리했다. 피플 파워가 터져 나온 것도 정치가 국민을 대변하지 않아서였다.

▷1950년대 초만 해도 필리핀의 1인당 국민소득은 우리나라의 3배였다. 지금은 우리의 10분의 1 정도다. 정치가 민생을 돌보지 않으니 인프라는 형편없고, 세금도 걷히지 않고, 정부 부채가 쌓일 수밖에 없다. 국내외 투자가 살지 않으면 당장 일자리가 없어진다. 배곯지 않으려면 해외에 나가 남의집살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해외에서 설움받는 ‘한국인 가정부’를 만들지 않으려면 정치싸움에 지새울 시간이 없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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