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선거 여성할당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입력 2006년 2월 25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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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민주당 서울 종로구청장 후보 경선에 참여했던 양경숙(梁敬淑·여) 서울시 의원은 남성 후보 4명과 겨뤄 44%의 지지율로 1위를 차지했지만 결선 투표에서 남성에게 3표 차로 석패했다. 상대 후보자가 최종 연설에서 “경선이 아니라 본선이 문제다. 보수적인 구민들이 여성 구청장을 뽑을 것 같으냐”고 주장한 게 당원들에게 먹혔기 때문이다.

4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여성의 정치 참여’는 논란이 되고 있다.

5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성 출마 희망자들은 정당법상 권고사항인 ‘지역구 후보의 30% 이상 여성 공천’ 조항을 의무조항으로 강화하는 등 ‘여성 배려 확대’를 요구하고 있다.

각 정당들도 여성 우대에 신경을 쓰고 있다. 한나라당 박근혜(朴槿惠) 대표는 24일 전국 16개 시도별로 최소 1개 기초단체장 후보는 여성으로 공천토록 노력해 달라는 뜻을 각 시도당위원장에게 전달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부 여성 정치인 사이에서 “배려 조항이 오히려 여성 정치인을 ‘보호의 덫’에 빠뜨려 장기적으로 지도자로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주장도 나와 주목된다.

▽여성 할당제가 여성 지도자 출현 막는다?=열린우리당 조배숙(趙培淑) 의원은 최근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 중 한 명은 반드시 여성이어야 한다’는 여성 배려 조항 ‘덕분에’ 당선된 뒤 오히려 이 조항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의원들이 “이미 당선이 확정된 사람에게 표를 줄 필요가 없다”며 유일한 여성 후보로 출마한 자신에게 투표하지 않은 결과 극히 소수의 표만 얻었기 때문에 앞으로 지도부에서 발언권이 약하게 됐다는 것.

5월 지방선거에서 처음 도입되는 기초의회 비례대표 후보 50% 여성할당제에 대해서도 오히려 풀뿌리 여성지도자의 출현을 막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양 전 의원은 “여성비례대표 의원들은 결국 자신의 뜻에 따라 활동하지 못하고 공천에 영향력이 있는 지역구 의원 등의 뜻에 따라 움직이게 될 것”이라며 “여성도 지역구 현장에서 성장해야 독자적인 정치적 뿌리를 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비례대표가 확대되면서 지역에서 활동하던 여성들조차 지역 출마를 기피하고 비례대표에 몰리는 현상이 벌어져 공천권을 쥔 시도당위원장이나 지역구 의원에게 더 종속된다는 것이다.

한나라당 김영선(金映宣) 의원도 여성 비례대표 확대만으로는 여성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보다는 전체 지역구의 일정 비율을 여성에게 할당하는 제도를 도입해야 여성들의 지역구 출마가 촉진되고 또 풀뿌리 여성 정치가 가능해진다는 주장이다.

▽어정쩡한 여성 배려 제도가 문제=대부분의 여성 정치인은 “여성 배려 제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제도를 제대로 만들지 못한 게 문제”라며 제도 보완을 통해 ‘여성 배려’를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열린우리당은 공직후보 경선 때 여성 후보에게는 득표수의 20%를 더해 주는 가산점 제도를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여성 후보들은 “자신이 얻은 표에 비례해서 인센티브가 생기는 것이니만큼 원천적으로 경쟁력이 약한 여성 후보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못 된다”고 말했다.

조직력이 중요한 당내 경선제도의 도입은 여성 정치인의 활동을 크게 제약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 풍토에서 아직까지 여성 후보 밑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남성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2002년 한나라당 서울 지역의 한 지구당 당원협의회장을 맡고 있던 박모(여) 씨는 ‘위원장에게 지역구를 정리할 기회를 주자’는 같은 지구당 남성 당원협의회장들의 제안에 따라 동반 사퇴했다가 당직을 빼앗겼다.

동반 사퇴 후 이 지구당은 당원협의회장 12명을 다시 선출했는데 동반 사퇴를 제안했던 남성 당원협의회장 10명은 다시 뽑혔지만 여성 2명은 탈락했다. 박 씨는 뒤늦게 위원장에게서 “남성 협의회장들이 ‘여성이 있으면 같이 어울리기 부담스럽다’고 해 남성으로만 협의회장을 구성했다”는 말을 들었다.

이처럼 지역구 현장에서는 아직까지 남성의 벽이 두껍기 때문에 기존의 여성 배려 제도에 더해 여성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을 제거할 수 있도록 ‘강제와 벌칙’을 강화하는 정교한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는 게 여성 정치인 대다수의 주장이다.

한나라당의 한 비례대표 여성 의원은 “여성 비례대표 의원들은 자질이 뛰어나도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한다”며 “여성 비례대표 의원이 실수하면 특히 더 많은 비판을 받고 심지어 자질론까지 나온다. 제도 개선과 함께 남성들의 인식 전환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

정용관 기자 yongari@donga.com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이 기사의 취재에는 본보 인턴기자 최지원(서울대 사회복지학과 4년) 이현민(고려대 전기전자전파공학부 2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 여성할당제 해외 사례

여성 할당제는 주로 영국 프랑스 스웨덴 노르웨이 등 유럽 국가에서 활발하게 적용되고 있다.

특히 영국 노동당이 1992년 총선 패배에 따른 반성에서 도입한 여성 할당제가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힌다. 지지율이 낮았던 노동당은 1997년 총선에서 ‘당선 가능성이 높은 지역구 후보에 여성으로만 후보자 명단을 작성한다’는 파격적인 선언을 했다. 여성 후보 155명을 내 이 가운데 101명을 당선시켰다. 이는 노동당이 전국에서 보수당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18년 만에 정권을 다시 잡게 만든 요인이 되기도 했다.

영국 여성 의원의 수는 1992년 총선 때 60명에서 1997년 총선 때 120명으로 늘어났다. 노동당은 이후 여성할당제를 폐지했지만 여성 의원 비율은 지금도 비슷한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다. 여성계는 “한 번 일정 비율 이상으로 여성이 국회에 들어가면 그 이후에는 할당제 없이도 여성이 당선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예”라고 말한다.

프랑스는 2000년 각급 선거 후보에 여성을 50% 공천하도록 하는 ‘남녀동수 공천법’을 통과시켰다. 그 결과 2001년 지방선거에서 50%의 여성 할당이 이뤄져 여성 의원이 전체의 47.5%를 차지하게 됐다.

최근에는 미첼 바첼레트 칠레 대통령, 타르야 할로넨 핀란드 대통령, 엘런 존슨설리프 라이베리아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등 여성 국가 지도자도 속속 탄생하고 있다.

국제의회연맹(IPU)이 지난해 발표한 ‘세계 여성 의원 비율’에 따르면 한국은 13.0%로 조사 대상 184개국 중 65위였다. 이는 중국(20.2%)이나 모잠비크(34.8%)에도 못 미치는 비율이다.

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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