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프리즘]‘러너스 하이’

  • 입력 2006년 2월 24일 03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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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도 중독성이 있다. 운동을 하면 모르핀과 비슷한 화학물질인 엔도르핀이 생성된다. 엔도르핀이 뇌에 차면 사람들은 행복감을 느낀다. 이른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 혹은 ‘러닝 하이(Running High)’다. 주로 마라톤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일어난다. 엔도르핀은 오랜 시간 격렬한 운동을 하거나, 기진맥진한 상태까지 계속 운동을 해야 생성되기 때문이다. 물론 사이클 선수들에게도 발생하며 심지어 물리학도가 며칠씩 밤을 새며 무아지경으로 공부할 때도 일어난다. 러너스 하이를 한번 느껴 본 사람은 또 다시 그런 상태를 느껴보고 싶어서 미친다. 더욱 더 운동에 빠져들게 되고 곧 ‘운동 중독’으로 이어진다.

달리기 마니아 중에서 하루라도 달리지 않으면 ‘불안해 하거나 짜증을 내는 사람’을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심지어 어느 달리기 마니아는 무릎 인대가 끊어졌는데도 계속 달리다가 수술을 받은 예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달리기에 중독되었다고 볼 수 있다.

러너스 하이는 사람마다 그 느낌이 천차만별이다. 발생하는 상황도 다르다. 하지만 긴장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일어나지 않는다. 몸 컨디션이 좋아야 하고 마음이 편안해야 그 느낌이 온다. 마라톤대회에 나가 다른 선수들과 치열한 경쟁을 펼칠 때는 거의 러너스 하이가 나타나지 않는다.

지난해 서울국제마라톤 마스터스 남자 부문에서 우승한 이동길(31·위아·개인 최고기록 2시간 24분 03초) 씨는 “한마디로 몸이 붕 뜨는 기분이다. 그런 러너스 하이가 오면 다리에 힘이 완전히 빠져 더는 달릴 수가 없다. 대부분 훈련할 때 그런 느낌이 오는데 몸 컨디션이 좋은 상태에서 평소보다 좀 더 강도를 세게 했을 때 그렇다”고 말했다.

올해 서울국제마라톤에 마스터스 여자 부문 5연속 우승에 도전하는 문기숙(44·선양주조·개인 최고기록 2시간 47분 52초) 씨도 “평소보다 훈련을 세게 할 때 10∼20km지점에서 그런 경우가 자주 온다. 산 정상에 올랐을 때의 벅찬 환희감이라고나 할까. 1∼2km 정도 그런 상태가 계속 되는데, 이때 기분 좋다고 질주하면 큰일 난다. 오버워크로 인해 후반에 달릴 수 없기 때문이다. 초보자들은 초반에 러너스 하이가 오면 마구 뛰쳐나가는 경향이 있는데 이럴 때 부상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선수들은 어떨까. 역시 그들도 비슷하다. 피 말리는 경쟁을 펼쳐야 하는 각종 대회의 레이스 도중 러너스 하이가 오는 경우는 결코 없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36·국민체육진흥공단) 감독은 “가속도가 붙은 스포츠카를 탔을 때의 붕 뜨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현역 땐 대회를 마치고 회복 훈련할 때 주로 일어났다. 하지만 현역 때보다 은퇴한 뒤에 훨씬 더 많이 느꼈다. 아무런 부담 없이 자유롭게 달리기 때문일 것이다. 러너스 하이가 왔을 땐 금방이라도 튕겨 나가고 싶은 느낌이 드는데, 이때 그 충동을 지그시 누르고 일정한 페이스로 달리다 보면 오랫동안 ‘충만감’을 만끽할 수 있다”고 말했다.

‘봉달이’ 이봉주(36·삼성전자)는 어떨까. 그는 “대회에 나가서는 그런 경우를 한번도 느낀 적이 없다. 몸과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서 자유훈련을 할 때나, 대회가 끝난 뒤 회복기에 가볍게 조깅할 때 온다. 아마 수십 번은 경험한 것 같다. 머리가 맑아지고 경쾌한 느낌이 든다. 날아갈 듯하다. 그 시간은 한 5분 정도 지속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 여자마라톤의 일인자 이은정(25·삼성전자)도 “자유훈련 때 주로 오는데 편안한 마음으로 70∼80% 정도의 에너지로 달릴 때 느낀다. 이럴 땐 계속 달려도 전혀 지치지 않을 것 같고 또 계속 달리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한 번 오면 30분 이상 계속 될 때도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1등으로 골인했을 때의 희열과 러너스 하이의 행복감은 어떻게 다를까. 황영조 감독은 말한다. “1등으로 골인했을 때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희열로 가득 찬다. 정신적인 기쁨이 훨씬 크고 오래오래 간다. 잠깐 왔다 가는 러너스 하이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운동은 ‘이로운 바이러스’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지나치면 좋지 않다. 중독되면 마약이나 같다. 운동은 ‘적당히 즐겁게’ 해야 러너스 하이를 느낄 수 있다.

김화성 스포츠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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