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서울안 작은 세계’ 이태원 포켓볼 리그

  • 입력 2006년 2월 24일 03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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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할리우드 클럽’에서 15일 열린 ‘스파이 클럽 슈터스’와 ‘할리우드 XXX’ 팀의 포켓볼 경기. 이들은 피부색과 종교가 다르지만 포켓볼을 통해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할리우드 클럽’에서 15일 열린 ‘스파이 클럽 슈터스’와 ‘할리우드 XXX’ 팀의 포켓볼 경기. 이들은 피부색과 종교가 다르지만 포켓볼을 통해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미국 하버드대 역사학부의 이리에 아키라 교수는 저서 ‘20세기의 전쟁과 평화’에서 “국제 질서는 문화의 다양성 위에 구축되어야 한다”며 “글로벌 시대에 평화는 국경을 초월한 개인이나 집단의 네트워크를 통해 이루어질 가능성이 커진다”고 말했다. ‘문화의 다양성’과 ‘개방된 네트워크’가 글로벌 평화의 키워드라는 것이다. 올림픽 등 스포츠 제전이 이리에 교수가 주장하는 글로벌 평화의 가능성을 엿보게 하지만,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도 이런 ‘작은 세계’이 있다.》

이태원동 일대 15개 바(Bar)에서 펼쳐지는 ‘이태원 포켓볼 리그’(Itaewon Pool League). 30여 개 국적의 400여 명이 매주 수요일 밤에 포켓볼 경기를 치른다. 이들은 프로 선수가 아니라 애호가로 미국 유럽 동남아 중동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출신이다. 한국인도 여러명 있다.

이 리그는 1999년 시작됐으며 팀당 6∼18명의 선수로 구성돼 있다. 현재 진행 중인 2006년 상반기 시즌에는 30개 팀, 400여 명의 선수가 참여하고 있다. 이 중에는 미국과 팔레스타인 출신 외국인들이 한 팀을 이룬 곳도 있다.

포켓볼을 통해 ‘평화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들여다봤다.

○ 국적 직업 종교를 넘어선 모임

서울의 대표적인 외국인 거주 지역인 이태원의 포켓볼 리그는 열린 네트워크다.

만 19세 이상의 성인으로 프로 선수가 아니면 국적 성별 직업 종교에 상관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나이에 제한을 두는 것은 경기가 바에서 열리기 때문.

팀이 만들어지는 방식도 ‘끼리끼리’와 거리가 멀다.

직장 동료 등 원래 알던 사람끼리 팀을 구성하는 경우는 드물다. 단골 바에서 자주 보던 이들이 함께 맥주를 마시거나 당구를 치며 자연스럽게 팀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미국과 팔레스타인처럼 비우호 국가 출신이 모인 팀을 비롯해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 민간인과 군인, 피부색이 다른 사람끼리 팀워크를 맞추는 모습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스파이 클럽 슈터스’라는 팀에는 미국인 영국인 팔레스타인인이, ‘내슈빌’ 팀에서는 영국인 아프가니스탄인 미국인이 함께 활동 중이다.

스파이 클럽 슈터스의 스콧 캠(미국) 씨는 엔지니어이고 팀 동료인 제이슨 잘비스(미국)와 브랜든 하우(영국) 씨는 각각 경희대와 이화여대 교수다.

독일의 맥주 이름에서 따온 ‘예거밤’이란 팀에서 활동하는 백인인 웨슬리 루이스(주한미군) 씨는 나이지리아 출신인 아니마샨 이브라힘(흑인·섬유회사 근무) 씨와 한 팀을 이루고 있다. 내슈빌 팀의 마크 존스(영국·단국대 교양영어실 교수) 씨는 “이태원 리그에서는 국적 직업 종교 인종으로 팀을 구분하는 일이 없다”며 “당구를 통한 문화적 교류를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개방형 국제 네트워크’다”고 말했다.

○ 리그는 미국식, 대접은 한국식

당구는 유럽이 원조다. 14, 15세기경 크리켓과 유사한 옥외 스포츠가 스페인 영국 프랑스에서 실내 게임으로 개량돼 오늘날의 형태로 바뀌어 왔다고 한다.

이태원 리그 운영 방식은 미국식이다. ‘홈 앤드 어웨이’ ‘플레이오프’ ‘홈어드밴티지’ 등 미국프로야구(MLB) 미국프로농구(NBA) 등에서 적용하는 방식이다.

흥미로운 점은 상대 팀에 대한 ‘접대’. ‘더치 페이’에 익숙한 외국인들이지만 홈 경기 때는 원정팀에 맥주 2000cc짜리 피처 2잔을 사야 한다. 집으로 찾아온 손님에게 돈을 쓰게 할 수 없다는 취지로 한국적 정서인 셈이다.

미국 출신으로 리그 회장인 제임스 듀이 씨는 “30여 개 국적의 사람들이 유럽에서 탄생한 당구를 미국 프로스포츠 방식을 통해 한국에서 즐기는 현상이 글로벌이며 국제 문화의 다양성”이라고 말했다. 영어는 소통의 필수 조건이 아니다. 영어를 유창하게 하지 못하는 이들도 얼마든지 리그에서 활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펍’의 팀원으로 러시아 출신인 ‘비탈리’(별명) 씨는 영어를 잘하지 못하지만 만국 공통어인 ‘보디랭귀지’로 통하면 팀웍을 이루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고 한다.

팀원들은 그가 큐를 잡으면 ‘hit(쳐라)’ ‘slowly(천천히)’ ‘bad(나쁜)’ ‘good(좋은)’ 등 쉬운 단어로 간략하게 설명했다. 공을 쉽게 칠 수 없는 경우에는 여러 명이 다가와 직접 당구공과 포켓을 가리키거나 큐대의 방향을 잡아 주기도 했다. 그는 “쉬운 단어와 보디랭귀지로도 얼마든지 소통할 수 있고 가까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

○ 정치-종교 문제는 관심 없어

이곳에서는 미국 유럽 중동 출신이 어울려 지내므로 논쟁의 불씨가 되는 정치나 종교 이야기는 잘 나오지 않는다.

리그 창시자인 밥 데니(미국) 씨는 “아랍 출신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며 미국과 아랍권의 분쟁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으나 함께 내린 결론은 ‘정치인들이 바보’라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갈등의 소지가 있는 정치와 종교보다 포켓볼과 친목에 관심을 갖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어서 리그가 수년간 이어지고 구성원들도 다양해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무타셈 익바잇(팔레스타인·무역업) 씨는 “여기는 중동이 아니라 한국”이라며 “이라크전쟁이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이곳에 사는 이들의 관심사가 아니다”고 말했다.

루이스 씨는 “이태원 리그에서 내 신분은 미군이 아니라 당구 선수”라며 “재미와 친목을 추구하는 자리에서 정치나 종교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환영받기 어렵다”고 밝혔다.

경기 전후 나누는 대화의 주제도 대부분 탈정치적이다. ‘제스터스’ 팀의 데이비드 룰(영국·영어학원 강사) 씨는 “정치 종교보다 잉글랜드와 한국의 2006년 독일 월드컵 예상 성적을 가지고 논쟁을 할 때가 많다”며 웃었다.

○ 한국의 글로벌 지표

이태원 리그는 한국 글로벌 지표로도 볼 수 있다. 듀이 회장은 “이 리그는 한국에 얼마나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이 모여서 공통의 문화를 이루고 사는지 보여 준다”며 “그러나 외국인들이 왜 이곳에만 모이는가도 짚어 봐야 한다”고 말했다.

리그 첫 해인 1999년에는 참가자 대부분이 주한미군과 군무원들이었으나 매년 국적과 직업이 다양해지고 있다. 주한미군 관계자 비율은 현재 20%로 줄었다.

그러나 외국인들이 이태원에 몰리는 이유는 한국의 배타적인 사교 문화 때문이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한 살 때 프랑스로 입양된 토마스 델헤이 씨는 “언어의 차이로 한국인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기 쉽지 않다”며 “이태원에서는 영어가 잘 통하고 다양한 국적의 사람을 볼 수 있어 유럽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밝혔다.

캐나다 교포이며 영어학원 강사인 김모 씨는 “한국에서는 거주지역 직업 학교 나이 등으로 사교 그룹을 형성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며 “외국인이나 교포들은 이런 배타적인 그룹에 들어가는 게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 모인 외국인들은 “정말 한국이 세계화됐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이태원 리그에 한국인이 더 많이 참가하고 서울의 압구정동 종로를 비롯해 지방의 도시에도 이런 모임이 많이 생겨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태원 포켓볼 리그는:

이태원 포켓볼 리그는 1999년 주한미군부대 내 학교 교직원으로 일하는 밥 데니 씨가 처음 제안했다. 당구를 좋아하는 그는 이태원에 당구대가 있는 바를 돌아다니며 리그를 제안했다.

첫해 12월 8개 팀이 참여했고 2002년 이후 리그의 규모가 급성장했다. 이때부터 리그는 1월∼6월, 7월∼12월 매년 2번의 시즌으로 진행됐다. 팀은 6명∼18명으로 구성되며 시즌당 20경기를 치른다. 한 경기에는 팀당 6명의 선수가 참여하는데 개인별 2경기씩 모두 12경기, 2인조 경기 세 차례를 치러 종합 성적을 따진다. 이들 30여개 팀은 스트라이프(stripe) 솔리드(solid) 하이(high) 로(low) 등 4개의 디비전으로 나뉘어 각 디비전의 1위를 다툰다. 플레이오프전은 스트라이프와 솔리드, 하이와 로 디비전의 1위끼리 우열을 겨루며 이들 간의 승자가 시즌 우승자를 가린다. 경기마다 개인전 승패를 합산하는 개인 순위도 낸다.

팀 이름은 홈 경기장으로 쓰고 있는 바의 이름에서 따온 경우가 많다. 가령 제스터 바를 홈으로 쓰는 팀은 ‘제스터스’, 돌체비타 바가 홈인 팀은 ‘돌체비타 오하나’로 이름을 지었다.

글=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사진=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리그 이끄는 제임스 듀이 회장 인터뷰▼

“이태원 포켓볼 리그에 참가하는 이들은 하나의 ‘작은 세계’를 이루는 구성원입니다.”

이 리그의 제임스 듀이 회장(사진)은 “스포츠를 통해 스트레스를 풀고 글로벌 친구도 사귈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주는 게 목적”이라고 말했다. 수요일 밤마다 경기를 하는 것도 바쁘게 돌아가는 한 주의 중간에서 일상을 뒤돌아보는 여유를 갖자는 취지.

그는 홍콩의 컨설팅 회사에서 근무하다가 1996년 삼성화재 방재연구소 상근자문역으로 부임했다. 그는 엔지니어링 기법을 이용해 화재 홍수 지진으로 인한 사고 발생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사고 최소화(Loss Control) 전문가.

이태원 포켓볼 리그의 회장은 2005년 1월부터 맡고 있다. 회장의 임기는 1년이고 투표로 선출한다. 그는 “리그 창설 멤버로서 뜻깊은 일을 하고 싶어 회장을 맡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참여하는 사람이 크게 늘어나 경기 결과를 종합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며 “경기 도중 언쟁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폭력 시비로 번진 일은 없었다”고 말했다.

이 리그는 매년 사회복지단체에 기부금을 내고 있다. 첫해부터 지금까지 3000여만 원을 냈다. 팀당 30만 원의 참가비를 받는데 시즌 종료 파티 등 운영비로 쓰고 남은 돈은 모두 기부한다. 2005년에는 광주의 보육시설인 ‘경애원’과 한국휠체어테니스협회에 각각 340만 원과 200만 원, 2004년에는 중증 장애아동시설인 ‘가브리엘의 집’과 대한적십자사에 각각 250만 원과 180만 원을 기부했다.

듀이 회장은 “리그에 참가하는 이들은 외국인이자 한국 사회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기부금을 내는 게 당연하다”며 “참가자들은 모두 한국 사회에 기여한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국인 여성과 결혼한 그는 “불고기 삼겹살 김치를 좋아하며 한국의 역동적이고 끈끈한 문화가 좋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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