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창혁]동굴 속의 황제들

  • 입력 2006년 2월 24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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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에 초중고교를 다닌 한국의 남자 아이들에겐 유엔 사무총장이 ‘무지무지하게 높은 사람’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몇 년 전 한국 남자들을 ‘동굴 속의 황제’라고 꼬집어 화제가 됐던 성공회대 전인권(全寅權) 교수의 ‘남자의 탄생’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어린 시절, 나는 친구들과 ‘유엔 사무총장과 미국 대통령 중에서 누가 계급이 더 높은가’라는 문제로 침을 튀겨 가며 논쟁을 벌이곤 했다. 아마 남성 독자들은 나와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유엔군의 도움으로 ‘북한 괴뢰군’을 무찌른 6·25전쟁의 기억이 아직 생생할 때여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 다음 다음 페이지에 나오는 얘기가 재밌다.

“이 스토리에는 좀 아찔한 비밀이 있었다. 만약 우 탄트 유엔 사무총장이 버마(현 미얀마) 출신의 외교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나의 세계관은 큰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저자는 한국의 남자들이 어떻게 ‘신분적 인간(a man of status)’으로 성장해 가는지를 설명하는 중에 이 얘기를 꺼냈지만, 내겐 좀 색다른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얼마 전 유엔 사무총장 선거 출마를 선언한 반기문(潘基文) 외교통상부 장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 탄트 사무총장이 취임한 게 1961년이니까 1944년생인 반 장관은 그때 고등학생이었을 것이다. 고등학생이 어린 시절의 전 교수처럼 ‘유엔 사무총장과 미국 대통령의 계급’을 놓고 논쟁을 벌였을 것 같지는 않지만, 1960년대에 초중고교를 보낸 사람들에겐 유엔 사무총장 후보를 낸 오늘의 대한민국이 격세지감(隔世之感) 그 자체일 것이다.

찾아보니 ‘2006 한국인 출신 유엔 사무총장 당선을 위한 국민운동본부’까지 있었다. 격세지감이 깊을수록 대한민국에 대한 자부심도 높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신문 기고, 방송 출연을 통해 개인의 영예요 국가의 영광이라며 흥분하고 있다. 하긴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지만 대통령까지 나서 재외공관장들에게 “(반 장관을 당선시키지 못하면) 국물도 없을 줄 알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으니….

무슨 시비를 붙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격세지감을 잠시 뒤로 물리고 이런 생각을 해 봤으면 한다. 혹시 우리는 아직도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자리를 지체나 신분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 아닐까? 그래서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지체’에 대한민국의 ‘신분’을 갖다 놓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닐까?

정녕 우리는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자리나 국가 이익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위해 봉사할 준비가 돼 있는가?

전 교수는 우 탄트 사무총장이 ‘버마라는 그런 꾀죄죄한 나라의 대표’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선생님들도 그 사실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했다. 어쩔 수 없는 그 시절 우리의 눈높이였을 것이다. 객관적 눈높이를 잃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던 ‘동굴 속 황제’의 콤플렉스였을 것이다.

지금은? 그 황제들은 과연 동굴을 벗어났을까? 대답할 자신이 없다. 아 참,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누구 아시는 분?

김창혁 국제부 차장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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