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남진우]40주년 ‘창비號’의 다음 항로는

  • 입력 2006년 2월 24일 03시 06분


코멘트
글에서 수사적 과장을 즐겨 하는 고은 시인은 1960년대에 당시 문단의 대표적 존재였던 시인 서정주를 가리켜 ‘정부’라고 했고 소설가 김동리를 가리켜 ‘종교’라고 한 바 있다. 전후 한국 문학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시인 작가에 대하여 후배작가가 바칠 수 있는 최대한의 존경과 어느 정도의 야유를 그렇게 나타낸 것이다.

21세기에 접어든 한국 문단엔 서정주나 김동리처럼 절대적 권위를 행사하는 특정인이 존재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다원화되고 민주화된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 개인을 대신하여 몇 개의 문학 매체가 한국 문학을 주도해 나가고 있다고 한다면 그리 큰 망발은 되지 않을지 모른다. 적어도 ‘창작과비평’의 경우 어떤 경향의 문학인이나 문학 지망생 및 특정 이념의 소유자들에게는 ‘정부’이자 ‘종교’의 역할을 변함없이 수행하고 있다. 사회 모든 부문에서 권력이 해체되고 그에 따라 빠르게 권위 역시 무너져 가는 시대에 창비가 보여 주는 의연함과 일관됨은 주목과 상찬의 대상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런 점에서 최근 창비가 계간지 창간 40주년을 맞아 기념과 축하의 시간을 갖게 된 것은 그 진영에 소속된 사람만이 아니라 한국어로 글을 쓰고 사유하는 모든 사람에게 뜻 깊은 감회와 더불어 우리 지식사회의 현주소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지난 시절에 창비는 단지 창작품의 발표 지면에 그치지 않고 지배질서에 저항하는 지식인들의 집회장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권력이 신문 방송 등 언론을 재갈 물린 상태에서 창비는 문학적 우회를 통해서나마 대항적 공공 영역을 창출하고 확대해 나가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민족문학론이나 리얼리즘론 분단체제론 등 창비가 선도한 이론은 한국 문학, 나아가 한국 사회를 보는 시각에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가져왔다. 아울러 개인적 희생을 감수한 그들의 주장과 실천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오염된 사고의 굳은 각질을 벗겨 내고 많은 독자의 의식의 전환을 이룩하는 데 성공했다. 따라서 정치적 민주화가 상당히 진척된 지금 창비가 현재 우리 지식사회의 담론 배치 공간에서 제일 큰 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창비를 창간 시부터 작금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견인해 오고 노련하게 관리해 온 백낙청이라는 걸출한 지식인의 존재는 한국 사회에 주어진 흔치 않은 축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덕분에 문학비평이라는 자칫 문화적 엘리트의 불모적인 소일거리에 그치기 쉬운 영역은 한 시대를 대표하고 주도하는 담론의 생산기지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며 미시적 텍스트 분석에 머무르지 않는 일종의 ‘경세(經世)의 학(學)’으로 구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창비 앞엔 그동안 이룬 성과만큼이나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만만치 않게 산적해 있다. 무엇보다 현 단계 창비의 정치적 성공이 문학적 성공을 자동적으로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계간지 편집에서 문학을 특권적 중심에 두고자 한다는 거듭된 다짐에도 불구하고 창비의 문학 담론은 아직도 정치사회적 담론에 더부살이하는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사회 전반의 민주화와 더불어 창비는 이제 저항성이나 운동성을 내세우기 힘든 처지가 되어 버렸다. 민족문학론이나 분단체제론 등 창비가 강조해 온 이념적 모델 역시 순수하게 받아들여지기보다 매 순간 현실 정치권과의 연루 관계를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조건에 놓여 있다. 민주화를 향한 험난했던 여정을 과거의 일로 치부하면서 세계화라는 새로운 도전에 대응하고자 하는 젊은 세대의 가파른 부상과 변화하는 현실은 창비를 포함해서 한국 문학계 전반에 새로운 이념적 방향 설정과 이론적 문제틀의 구성을 요구하고 있다.

영국의 진보적 문학이론가 레이먼드 윌리엄스에 따르면 한 시대 ‘문화의 장(場)’은 ‘지배적인 것’ ‘잔존하는 것’ ‘부상하는 것’ 사이의 교섭과 갈등으로 구성된다. 우리 문학의 경우 흔히 ‘문협 정통파’로 불렸던 구세대의 잔존하는 세력은 현실적으로 거의 힘을 잃은 반면 창비가 빠르게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면서 그 외연을 넓혀 가고 있다. 따라서 우리 문학계의 앞날은 창비의 자기 갱신과 더불어 그것에 창조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매체와 세력의 부상에 따라 그 판도가 결정될 것이다. 정치적 억압이라는 바닥짐(배의 전복을 방지하기 위해 뱃바닥에 까는 무거운 화물)이 없는 상태에서 ‘창비호’가 어떻게 균형을 잡고 항해를 해 나갈지 한국 문학, 나아가 한국 사회가 관심을 갖고 지켜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남진우 시인·명지대 교수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