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두번째 추기경 탄생]“오늘은 鄭추기경이 상석에…”

  • 입력 2006년 2월 23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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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미사정진석 서울대교구장의 추기경 임명 소식이 전해진 22일 밤 서울 명동성당에서 신자들이 감사 미사를 올리고 있다. 이훈구  기자
감사의 미사
정진석 서울대교구장의 추기경 임명 소식이 전해진 22일 밤 서울 명동성당에서 신자들이 감사 미사를 올리고 있다. 이훈구 기자
22일 정진석(鄭鎭奭) 대주교의 추기경 서임이 발표되기 30분 전인 오후 7시 반 서울 중구 명동성당 정 대주교의 집무실에 손님이 찾아왔다.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이었다.

“축하합니다.”

정 대주교가 “고맙습니다”고 화답한 뒤 상석을 권했으나 김 추기경은 “오늘만큼은 정 추기경이 상석에 앉으시라”고 양보했다.

김 추기경은 “정 대주교가 추기경이 안 돼 자책감을 가졌고 걱정이 되기도 했다”고 술회했다.

“유럽이나 아시아 등의 큰 교구에서는 교구장이 되면 조만간 추기경으로 임명되는 전통이 있습니다. 서울대교구는 아시아에서 제일 큰 교구 중의 하나이고, 한국의 대표적인 교구인데다, 평양 교구장 서리도 겸하고 있습니다. 그런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분이 추기경으로 선임되는 전통이 세워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번 교황청의 추기경 선임은 그런 의미에서 더욱 감사하고 기쁩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소속의 신부와 수녀 등은 미리 준비한 꽃다발을 김 추기경에게도 선사했으나 그는 손사래를 쳤다. 축하받을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새로운 추기경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날 정 대주교가 한국의 두 번째 추기경에 임명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산파야말로 김 추기경이었다.

김 추기경은 37년 전 최연소(47세)의 나이에 국내 최초의 추기경으로 서임된 이후 한국 가톨릭을 탄탄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이는 그의 추기경 재임기간에 한국 가톨릭 신자가 5배 이상 늘었다는 외형만 두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1970년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위원장으로 선출됐고, 지난해 4월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즉위미사를 공동 집전해 세계 가톨릭교회에서 한국의 위상을 널리 알렸다는 점 때문만도 아니다.

지난 37년간 김 추기경이 걸어온 족적은 한국사회에서 추기경이 갖는 의미를 그 어떤 수식어나 논리적 설명보다도 더 확실하게 보여줬다.

김 추기경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지학순(池學淳) 주교가 체포됐을 때 박정희(朴正熙) 대통령과의 독대를 통해 지 주교의 석방을 이끌어냈다.

또 1976년 명동성당에서 열린 3·1운동 기념미사와 천주교-개신교 합동기도회에서 유신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민주구국선언문’이 발표된 뒤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과 문익환(文益煥) 목사 등이 구속되자 3·15시국기도회를 열고 이들이 수감된 교도소를 찾아 용기를 북돋웠다.

김 추기경은 1980년 1월 새해 인사차 방문한 전두환(全斗煥) 당시 보안사령관에게 12·12쿠데타를 빗대 “서부활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그해 5·18민주화운동이 발생했을 때는 광주교구로 “광주의 진실을 알려야 합니다”라는 메시지를 내려 보내 폭압적 상황에서도 꿋꿋이 진실의 편에 섰다.

1987년 4·13호헌조치가 발동됐을 때 “개헌의 꿈이 깨져 국민에게 실망을 안겨줬다”는 김 추기경의 부활절 성명은 이후 각계의 개헌지지 성명을 이끌어 내는 도화선이 됐다. 그해 6월 민주항쟁 때 명동성당으로 경찰 투입이 임박한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그 뒤에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그리고 그 뒤에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라며 막아섰다.

김 추기경의 이런 활동은 국내외적으로 가톨릭의 지위를 크게 격상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또 따뜻한 마음을 지닌 한 인간으로서 장애인과 사형수들을 만났고, 강제 철거로 길거리에 나앉은 빈민들을 방문하였으며, 농민과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노력했다.

김 추기경은 노무현(盧武鉉)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고비마다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고 이 때문에 정권 핵심인사들을 비롯한 이른바 진보세력으로부터 비난과 험한 소리를 듣는 곤욕도 묵묵히 감수해 왔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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