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성희]한국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 입력 2006년 2월 20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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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를 연구하는 각국의 학자들이 모였다. 먼저 이탈리아 학자가 연구 주제로 “코끼리는 무엇을 먹을까”를 제안했다. 그러자 프랑스 학자들이 맞받았다. “아니, 그것보다는 코끼리의 사랑법을 연구합시다.” 일본 학자도 빠지지 않았다. “그러지 말고 코끼리들의 랭킹을 먼저 매겨야지.” 마지막으로 한국 학자가 말했다. “코끼리들에게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봅시다.” 한국에 온 이래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귀에 못이 박이게 들은 한 외국인이 들려준 조크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근대화 역사가 가져온 부산물인가.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남의 거울에 우리를 비춰 보고 비로소 스스로를 발견하는 버릇이 생긴 듯하다. 우리 안의 귤을 탱자로만 알고 있다가 다른 나라 사람들이 귤이라고 하니까 비로소 인정하는, 말하자면 귤화위지(橘化爲枳)가 거꾸로 된 현상이라고 하면 다소 과장일까.

원조 탱자는 ‘용사마’ 배용준이 아니었나 싶다. 평범한 그가 일본에서 그렇게 큰 인기몰이를 할 줄 우리가 꿈엔들 알았을까. 우리 안방에서 인기를 끈 ‘대장금’이 중국 대륙까지 뒤흔들 걸 예상한 사람도 많지 않았을 것이다. ‘용사마’의 뒤를 이은 많은 한류 스타는 누가 뭐래도 반듯한 외모에 빼어난 연기력을 갖추었는데도 우리는 그저 덤덤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최근 몇 년간 아시아를 휩쓴 한류 열풍은 한국의 탱자들이 줄줄이 귤로 거듭나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얼마 전 미국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 진출한 가수 비의 공연을 두고 언론들은 ‘한류가 태평양을 건너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아시아의 스타로 만족하지 않고 이제 서양인들도 열광하는 세계적인 엔터테이너로 거듭나고 싶어 하는 공연기획팀의 열정을 읽을 수 있다. 뉴욕타임스의 공연 리뷰를 보면 아직 그러기에는 2% 부족한 모양이다. 새롭고 자극적인 것을 갈망하는 뉴욕의 예술계에서 승부하려면 그들이 놀랄 만한 뭔가를 보여 줘야 하는데 ‘한국말로 더빙된 오래된 MTV를 보는 것 같다’는 평을 들었으니 하는 말이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사랑스러운 우리의 가수다. 비가 희망대로 ‘빌보드 차트 1위’를 하면 축하할 일이겠으나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에겐 별 부족함이 없다.

이에 비해 같은 무렵 세상을 떠난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이런 게임의 룰을 갈파하고 아예 새로운 지평을 개척했다는 점에서 천재적이다. 한국의 혼과 서양의 기술을 접합한 한혼양재(韓魂洋才)의 실천적 예술인으로 불리는 그는 광활한 세계 예술무대에서 우뚝 서기 위해 철저하게 자기 안으로 들어갔다.

남의 잣대를 ‘참조’하는 수준을 넘어 거의 맹신하는 분야는 비단 예술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학계에서는 외국의 학자들이 자신들을 위해 만든 인용 기준 색인인 과학논문인용색인(SCI)과 사회과학논문인용색인(SSCI)을 최고 대우하고 국내의 대표적 저널을 그 반 푼 정도로 여긴다. 국내 대학 학위 소지자는 외국 대학 학위 소지자에 비해 임용에서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다. 한글 논문보다 영어 논문에 가산점이 붙고 영어 강의에 보너스가 주어진다.

경제 사회 체육 분야도 마찬가지다. 국제통화기금(IMF)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세계은행(IBRD) 국제노동기구(ILO) 등에서 내놓는 한국경제 전망에 각종 국내 지표가 춤을 추고 국경 없는 기자회(RSF)나 국제언론인협회(IPI) 같은 곳에서 만든 언론자유 지표가 절대적인 기준인 양 회자되곤 한다.

박지성이 프리미어리그에서 첫 골을 터뜨렸을 때 환호하던 모습에는 “거 봐, 우리도 대단하잖아”라는 자기 확인의 안도감이 섞여 있다. 북미프로미식축구리그에서 최우수선수(MVP)가 된 하인스 워드의 경우처럼 한국인의 피만 섞여도 우리는 열광한다. 한국발 소식이 외신을 타면 다시 뉴스 밸류가 부가되어 국내 언론에 역으로 수입되는 것도 같은 이치다. 이런 논리라면 목하 스크린쿼터제 사수 운동도 이해가 간다. 거기에는 ‘우리=탱자=보호 대상’ 이라는 등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우리 거울로 바라보는 밝은 눈이 필요하다. 거기에 탱자라도 귤로 키워 낼 수 있는 좋은 토양이 보태진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다.

박성희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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