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한기흥]가난한 국가의 ‘생일잔치’

  • 입력 2006년 2월 16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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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편이 어려운 집에서 가장(家長)의 생일잔치를 치르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특히 가장이 평소 식구를 제대로 돌보지 않고 권위만을 내세웠다면 없는 살림에 마지못해 생일상을 차리는 사람도, 이를 받는 가장도 피차 마음이 편하긴 어렵다.

가부장적 전제 통치를 하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오늘 64회 생일을 맞았다. 북에선 ‘민족 최대의 명절’이다. 대규모 경축 행사가 열리고 화려한 불꽃이 평소 불빛이 거의 없는 북의 밤하늘을 수놓을 것이다.

주민들은 ‘지도자 동지’의 만수무강을 비는 대신 쌀 밀가루 설탕 콩기름 등 생필품을 특별 배급받는다. 간부들에겐 TV 냉장고 양주가 돌아간다. 통 크게 ‘생일 턱’을 내느라 김 위원장은 매년 1억 달러 안팎을 쓰는 걸로 정부는 추정한다. 2004년 북한 수출액(10억2000만 달러)의 10분의 1에 해당한다.

북한은 이를 재외공관, 무역상사, 총련 및 각 지역의 당 조직에 할당한 ‘정성금(精誠金)’과 ‘충성금(忠誠金)’ 등으로 조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故)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과 정몽헌 현대 회장도 2000년 김 위원장의 생일에 코냑 3병, 포도주 12병, 향수 5병 등을 선물로 보냈다.

그런데 올해는 미국의 대북(對北) 금융제재로 외부의 ‘돈줄’이 막히는 바람에 김 위원장은 어느 때보다 쪼들리는 생일을 맞게 됐다. 예년만큼 나눠 주지 못하거나 ‘품위’를 지키기 위해 능력 이상으로 무리할 개연성이 크다. 외신에 따르면 지난달 중국을 방문한 김 위원장이 미국의 경제제재가 이어지면 북한 체제가 무너질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를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에게 했다고 한다. 괜한 엄살이 아닐 것이다.

존 네그로폰테 미국 국가정보국장은 최근 “북한의 핵무기 보유 주장은 사실인 듯하다”며 “이미 핵무기를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한다”고 밝혔다. 북한은 마침내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에 이어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지 않고 핵보유국으로 사실상 인정받은 셈이다. 그러나 굶주린 주민들의 배가 핵무기로 채워지겠는가.

미국의 금융제재는 북한의 취약점을 분명히 보여 줬다. 역시 돈이다. 통치자금에 비상이 걸리지 않았다면 김 위원장이 중국 경제개혁의 상징인 ‘남순강화(南巡講話)’ 코스 견학이나 현대아산과의 금강산 관광사업 확대에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지금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은 ‘당근’이 아닌 ‘채찍’이다.

정부는 지난해 북한에 쌀 50만 t과 비료 35만 t을 줬다. 그러고도 핵과 위폐, 인권, 납북자 문제 등과 관련해 얼굴 한번 제대로 붉히지 못했다. 북한을 자극하지 않고 감싸는 게 능사가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한반도에 긴장을 초래할 대북 압박과 제재에 앞장서라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문제 제기를 해야 할 사안에 대해선 확고한 원칙에 입각해 당당하게 할 말은 하라는 것이다. 그게 북한을 진짜 위하는 길이다.

정부가 강조하는 ‘한국의 주도적 역할과 발언권’이란 게 미국에만 ‘노(No)’라고 하고, 북한엔 침묵하는 것이어선 곤란하다.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도 북한이 국제사회의 규범을 존중하는 보통국가가 되도록 만드는 게 시급하다. 더 늦지 않도록 북한의 결단을 촉구할 책임이 정부에 있다.

북녘 동포들이 오늘 하루라도 따뜻한 음식을 배불리 먹었으면 좋겠다.

한기흥 논설위원 eligi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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