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690>卷七. 烏江의 슬픈 노래

  • 입력 2006년 2월 14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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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진성은 고릉에서 백리길이 안 됐다. 다음 날 일찍 길을 떠난 한군은 짧은 겨울 해가 지기도 전에 진성 아래 이를 수 있었다. 한왕은 새로 도착한 조참과 관영의 군사들을 진성 북쪽 20리 되는 골짜기에 숨겨 놓고 나머지만 진성 아래 벌판에 진채를 세우게 했다.

한편 진성으로 물러난 패왕 항우는 성안의 곡식을 거두어 주린 군사들을 먹이고 민가를 비워 여러 날에 걸친 싸움에 지친 몸을 쉬게 했다. 며칠 안 돼 초나라 군사들은 날카로운 기세를 되찾았으나 곡식을 뺏기고 제집에서 쫓겨난 성안의 인심은 말이 아니었다. 원래도 별로 좋지 않던 초군의 평판은 한층 엉망이 되고, 창칼이 무서워 머리를 수그린 백성들도 속으로는 저마다 패왕과 초군에 이를 갈았다.

고릉 북쪽의 진채를 빠져나온 한나라 대군이 진성 밖 벌판에 다시 진세를 벌인 것은 패왕이 이끈 초군 3만이 그 성안으로 든 지 이레 만이었다. 해질 무렵 성 밖이 수런거리는 소리에 패왕이 문루 위로 올라가 살펴보니 어느새 달려온 한나라 군사들이 성 밖 들판을 뒤덮고 있었다. 하지만 그 군세는 처음 고릉으로 밀려들 때의 절반밖에 안 돼 보였다.

“이것들이 나를 너무 작게 보는구나. 바로 며칠 전에 이 곱절의 대군을 가지고도 한 싸움에 깨진 질그릇꼴이 나놓고 이제 그 절반의 군사로 우리를 뒤쫓으려 하다니. 이번에는 모조리 때려잡아 갑옷 한 조각 찾아가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아야겠다.”

울컥 화가 치민 패왕이 그대로 전군을 몰고 나가 한군을 짓밟아 버릴까 하면서 한 번 더 주변을 살폈다. 눈여겨보니 북쪽 하늘로 엷은 먼지가 치솟으며 은은한 살기(殺氣)가 뻗치고 있었다. 본능과도 같은 패왕의 전투 감각에 잡힌 병진(兵陣)의 기운이었다.

‘그 사이에 적의 원군이 이르렀구나. 저 능구렁이 같은 유방이 원군을 감춰 두고 나를 꾀어내려고 수작을 부리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함부로 성문을 열고 나갔다가는 뜻밖의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

여러 번 한왕 유방의 계책 같지도 않은 계책에 말려 어려움을 겪은 뒤라 패왕도 적잖이 신중해졌다. 그런 헤아림으로 앞뒤 없이 치솟는 울화를 억누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장수들을 모두 과인의 군막으로 들게 하라.”

이윽고 패왕이 좌우를 돌아보며 그렇게 시켰다. 그리고 장수들이 모두 모이자 평소의 그답지 않게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진성을 떠날 때가 온 것 같다. 원래부터 오래 머물려고 우리가 이 성에 든 것은 아니다. 이제 군사들은 충분히 쉬었고, 성 안팎에서 긁어모은 군량도 당분간은 버틸 만하다. 하지만 우리가 이대로 성을 빠져나가면 적은 더욱 기세가 올라 오히려 그 추격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또 한번 여지없이 적을 쳐부수어 우리를 뒤쫓을 엄두가 나지 않게 만들어야만 강동으로 돌아가는 남은 길이 편안할 것이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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