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億… 億’ 하는 세상… 소액 민사법정에 비친 서민들 애환

  • 입력 2006년 2월 13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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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한 채에 수억∼수십억 원. 자동차 한 대에 수억 원…. 그러나 서울중앙지법 민사 소액 법정을 찾는 서민들에게는 이런 것이 모두 다른 나라 이야기 같다. 서민들은 소액 사건 법정에서 물건값 몇십만 원, 전세보증금 몇백만 원에 ‘목숨을 걸고’ 다툰다. 민사 소액 사건은 2000만 원 이하의 빚이나 물건 값 등을 달라며 다투는 가장 ‘작은’ 사건들. 민사 사건은 일반적으로 소송가액 1억 원 이상이면 합의 사건, 1억 원 미만은 단독 사건으로 분류하고 단독 사건 가운데 소송가액 2000만 원 이하의 사건을 소액 사건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소액 사건은 1심 전체 민사 사건의 80% 정도를 차지한다. 결국 가장 많은 사람이 이 ‘소액 사건’ 분쟁 때문에 법원을 찾는 셈. 소액 사건 법정에는 세상의 온갖 사연과 소란이 그대로 반영된다. 소액 법정 풍경을 통해 서민들의 법과 삶을 들여다본다.》

“내 핸드백 가죽은 원래 이 장갑처럼 부드러웠어요. 핸드백 값 110만 원을 모두 돌려받게 해 주세요.”(소송을 낸 핸드백 주인 이모 씨)

“난 그런 돈 없습니다. 내가 오늘 수리도구랑 약품까지 다 가지고 나왔으니 판사님 앞에서 이 핸드백 원래대로 해 놓겠습니다.”(소송을 당한 가방 수리업자 김모 씨)

이달 초 민사 소액 재판이 진행 중인 서울중앙지법 북관 3호 법정.

이 씨는 수리점에 맡긴 핸드백 겉가죽이 뻣뻣해지고 은은한 미색이던 가죽 색깔도 바나나 색깔처럼 촌스럽게 변했다며 김 씨를 상대로 핸드백 값을 물어내라는 소송을 냈다.

두 사람은 이미 여러 차례 다툰 탓인지 법정에서도 한 치 양보가 없다.

판사는 이 씨가 가지고 나온 핸드백과 장갑을 만져 보고 김 씨가 들고 나온 수리도구들도 훑어본다.

“원고가 처음 낸 수리비 6만 원과 핸드백 복구비 12만 원에 좀 더 얹어서 피고(수리업자)가 20만 원 정도 주고 끝내는 건 어때요.”

두 사람도 한참을 다투다 지쳤는지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이고 법정을 나선다.

판사들은 소액 사건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최대한 들어 주고 가능한 한 조정으로 끝내려고 한다.

민사 소액 사건은 빠른 해결이 장점이다. 소송기간은 2∼3개월 걸린다. 소송비용은 9만5000원 이하의 인지대와 송달료가 전부다.

그러나 소액 법정에서 풀리는 건 돈 문제만은 아니다. 억울함과 답답함, 그동안 가슴에 맺힌 속내를 털어 내야 비로소 재판이 끝난다.

서민들의 전세보증금 다툼도 소액 법정의 단골 메뉴다.

10일 한 소액 법정에서 김모(55·여) 씨는 건물 지하 방에 세 들어 살다가 지난달 28일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고 주장했다. 김 씨는 집 주인이 전세보증금 1000만 원 중에서 300만 원을 못 주겠다고 해 소송을 냈다. 김 씨가 수도를 제대로 잠그지 않고 이사를 가서 물이 차는 바람에 방바닥을 다 뜯어내 고쳤다는 것이다. 공사비로 300만 원이 들었다는 것.

집주인은 법정에 나오지 않아 재판은 연기됐다.

김 씨와 함께 나온 김 씨의 아들은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해도 돈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우리는 법을 잘 몰라요. 판사님께서 잘 해 주시기를 기다리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사진사 이모(39) 씨는 한 디자인회사 실장과 100만 원을 받기로 하고 사진 작업을 해 줬다고 한다. 그런데 회사 사장이 “실장은 회사를 그만뒀고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해 소송을 냈다는 것.

이 씨는 “그 회사 재산을 가압류하면 소송비용이 더 들 수도 있겠지만 괘씸해서 그렇게라도 해야겠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소송에서 이긴 뒤에는 민망해하거나 허탈해하기도 한다.

회사원 김모(46) 씨는 지난해 5월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서 술을 마시다가 시비가 붙은 오모(26) 씨 등 2명에게 맞았다며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판사는 두 사람이 김 씨에게 75만 원씩 주도록 하고 조정으로 사건을 끝냈다.

김 씨는 최소한의 병원비를 받은 것뿐이라면서도 “이런 일로 법원까지 오게 된 것이 좀 민망하다”고 했다.

그는 “두 사람 다 연예인 준비생이라 직업이 변변치 않으니 가진 걸 가압류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부모들이 알아서 책임져 주면 좋겠다”면서 법원을 나섰다.

이날 재판을 시작한 지 한참이 지나 점심시간이 가까워 오지만 방청석에는 재판을 기다리는 사람이 더 많다.

재판을 끝내고 법정 밖으로 나간 사람들끼리 다시 실랑이가 벌어져 법정 밖도 소란스럽다.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이 기사의 기획 및 취재에는 본보 대학생 인턴기자 정혜진(고려대 교육학과 4학년) 하예린(고려대 언론학부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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