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안경환]사설-칼럼에도 반론청구하는 발상

  • 입력 2006년 2월 13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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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어떤 학술모임에서 한 언론학자의 발표를 들었다. 노무현 정부가 이끄는 대한민국의 ‘기이한’ 현상은 언론이 정부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언론에 도전하는 양상을 띠는 것이라는 요지였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부와 언론은 긴장관계에 선다. 그래야만 국민이 편하다. 언론도 또 하나의 권력이다. 언론 권력이 공권력과 밀착하기보다는 대립하는 것이 국민에게 더욱 유익하다. 따지고 보면 정부가 언론에 도전하는 것은 기이한 게 아니라 정상적인 것이다. 공권력이 언론을 통제하는 권위주의 시대에 살던 사람에게는 이상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그만큼 우리나라에 민주주의가 성숙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민주언론의 사회에서는 말의 침(針)과 글의 꼬리(鋒)가 난무한다. 사회에는 ‘사상의 공개시장’이 열려 있고, 누구에게나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때때로 상대방에게 억울한 일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니 당사자에게는 그릇된 사실을 바로잡을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은 “그릇된 ‘사실적 주장’으로 피해를 본 당사자는 반론보도를 청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폐지된 옛 ‘정기간행물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의 규정을 이어받은 것이다.

대법원이 10일 판결로 이와 관련해 유권해석을 내렸다. ‘사실의 보도’와 ‘의견의 표명’을 구분하여 사실 문제에 한정해 반론청구가 인정되며 의견 표명이나 비평은 반론청구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칼럼’은 개인의 견해이며 ‘사설’은 신문사의 의견이다. 대저 의견이란 똑같을 수가 없다. ‘다른 의견’이야 분분하지만 세상에 ‘틀린 의견’이란 있을 수가 없다. 그것은 민주 헌정의 기본원리다.

그런데 나라의 최고 법원이 판결을 내린 사실을 단 한 줄, 한마디도 보도하지 않는 언론기관도 있다. 모든 언론기관에 공통된 문제이고 국민의 초미의 관심사가 될 ‘사실’인데도 말이다. 공감도, 비판도 자제한 채 오로지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 독자와 시청자에게 세상의 일을 가려서 알리는 것이 그 기관의 의견이라면 의견일 수도 있다.

대법원의 판결은 언론 선진국, 민주 선진국의 일반적 규범과 맥을 같이한다. 우리 대법원의 독립성과 성숙도가 자랑스럽기도 하다. 정부가 당사자인 만큼 더욱더 그러하다. 정부나 공무원의 공적 행위에 대한 비판은 모든 민주시민의 특권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인(私人)의 경우보다 명예훼손이 성립하기 힘들다는 것이 여러 나라의 법리다.

어쨌든 이 판결을 계기로 새삼 유념해야 할 일이 몇 가지 있다. 무엇보다도 정부는 업적을 통해 국민을 설득해야지, 현란한 언어로 국민의 감성을 자극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 그런 정부는 종국에는 신뢰보다 오히려 불신을 얻기 십상이다. 스스로 ‘소수 정권’이라는 말로 비하할 필요도 없다. 다수 국민의 선택으로 탄생한 대통령의 정부가 어떻게 ‘소수 정권’으로 전락할 수 있는지, 듣기에 심히 불편하다. ‘억울한’ 소외감에서는 건전한 정책이 탄생하기 어렵다. 국정홍보처는 문자 그대로 정부의 업적을 능동적으로 알리는 일에 주력하고, 비판에 대응하는 데 과도한 정력을 낭비하지 말기 바란다. 성숙한 국민은 누가 옳고 그른지 가려내는 안목과 지혜를 갖추고 있다.

이번 대법원 판결을 통해 언론기관은 논평의 자유가 확대됐으며 그에 따라 사회적 공기(公器)로서의 책임도 더 커졌다. 그렇다면 언론도 건전한 국정 비판을 위해 더욱 신중한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승자의 미덕이기도 하다.

안경환 서울대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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