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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혈의 굴레’ 미국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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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혈의 굴레’ 미국 울렸다

입력 2006-02-11 03:06수정 2009-09-30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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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는 아프리카 추장의 아들, 즉 왕자다. 할아버지가 죽으면 아버지가 추장이 될 것이고 나를 아프리카로 부를 것이다.”

케냐 출신 흑인 아버지와 미국 캔자스 출신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는 어린 시절 친구들에게 이런 거짓말을 했다. 항상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다’는 자괴감 속에서 살던 그에겐 유일한 위안이었을지 모른다.

현재 미국의 유일한 흑인 상원의원이자 민주당의 차세대 주자로 꼽히는 버락 오바머(45·사진) 의원의 자서전 ‘아버지에게서 받은 꿈들(Dreams From My Father)’은 이처럼 ‘아프리칸-아메리칸’으로서 꿈과 절망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혼혈아의 얘기다.

그가 9일 자서전 오디오북으로 제48회 그래미상의 ‘최고 낭독 앨범’ 수상자로 선정됐다. 지난해 초 15시간에 걸친 오디오 작업 끝에 만들어진 자서전 오디오북은 55만 부 이상의 판매를 기록하며 인기를 끌었다.

갑자기 들려온 아버지의 사망 소식으로 시작하는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뿌리와 아메리카 흑인의 삶을 진솔하게 풀어썼다. 그의 어린 시절 회상기는 ‘백인처럼 군다(Acting white)’고 놀림 받는 흑인 청년들의 혼란스러움에 대한 미국인의 관심을 촉발시켰다.

‘라이프’ 잡지에서 검은 피부를 벗겨 내려 했던 한 흑인의 얘기를 읽으며 방황하던 혼혈아. 그는 영화 ‘아이 스파이’의 흑인 배우 빌 코즈비에겐 여자친구가 없고, ‘미션 임파서블’의 흑인은 지하세계에서만 사는 것을 발견한다.

이런 정체성의 혼란 속에 외톨이로 지내야 했던 그는 한때 ‘반항의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과격한 흑인인권운동가 맬컴 X와 신식민주의 논리에 심취하는가 하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여전히 흑인일 수밖에 없다”는 좌절감 탓에, 그리고 어두운 기억을 잊기 위해 마약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조숙한 흑인 청년은 세상을 이해하고 싶었다. 친구들은 조지프 콘래드의 소설 ‘어둠의 심연’을 읽는 그에게 “인종차별주의 소설이나 끼고 다닌다”고 놀린다. 그는 “난 흑인 얘기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백인들의 사고방식을 알고 싶어서 이 책을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버지는 두 살 때 떠나 버렸지만 그의 곁에는 항상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는 “못 배운 무식쟁이가 돼선 안 된다”고 가르쳤고 궁핍한 삶 속에서도 아들을 사립학교에 보냈다. 명문 컬럼비아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그는 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온 뒤 시카고의 지역사회 운동가로 변신한다.

그 후 하버드대 로스쿨에 들어간 그는 흑인으로선 처음으로 하버드대 법대에서 발행하는 ‘하버드 로 리뷰(Harvard Law Review)’ 편집장을 맡으면서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그가 1995년 젊은 나이에 이 자서전을 쓴 것도 이 때문이었다. 자신이 걸어온 길보다는 흑인이 특별한 자리에 올랐다는 데만 초점을 맞춘 기사를 보면서 자기 얘기를 직접 쓰기로 결심한 것이다.

졸업 후 그는 일리노이 주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해 1996년 주 상원의원에 당선됐고 2004년 연방 상원의원에까지 올랐다. 100명의 현직 상원의원 중 유일한 흑인이며 역대로는 다섯 번째다. 오바머 의원은 수상 소식을 접하고 “정치가가 몇 시간 동안 얘기한 뒤 상을 받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인데 그래미상을 받게 되다니 대단히 기쁜 일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의 내 직업을 그만두진 않겠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선 겸손과 유머가 묻어 나왔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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