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DJ와 平壤, 그리고 ‘태양절’

  • 입력 2006년 2월 11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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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은 “4월에 경의선 기차로 평양에 가고 싶다”고 했지만 4월은 피했으면 한다. 4월은 김일성 주석의 생일(15일)이 든 달이다. 북한에선 4월 15일을 ‘민족 최대의 명절’로 친다. 명칭부터가 ‘태양절’이다. 생전에 김 주석을 ‘민족의 태양’이라고 하더니 생일도 그렇게 부른다. 성대한 경축행사가 한 달 내내 계속된다. DJ의 방북이 ‘태양절 축하사절’쯤으로 비치거나 격하된다면 모양새도 좋지 않고 성과도 기대하기 어렵다.

‘태양절’에 쏟는 북의 정성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해외 친북단체들을 동원해 국가별 추모위원회까지 만든다. 올해도 캄보디아 타지키스탄 레바논 오스트리아 등에서 ‘태양절 기념준비위원회’가 이미 결성됐다. 대표적 축하 행사인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에는 해마다 30∼40개국 대표단이 초청된다. DJ도 그 대열에 합류하고 싶은가.

그렇지 않아도 4월은 국내외적으로도 대단히 민감한 시기다. 5·31지방선거가 코앞에 있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도 이달에 시작된다. 곳곳에서 갈등이 꿈틀대는 시기다. DJ는 ‘6자회담의 진전과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가려는 것이겠지만 성과는 불투명하다.

북한 핵은 기본적으로 북-미(北-美)가 풀 문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간절히 원하는 체제 보장도 미국만이 해 줄 수 있다. 우리의 영향력은 제한돼 있다. 이것이 현실이다. 섣부른 중재 시도는 일을 더 꼬이게 할 수 있다.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도 지난해 6월 김 위원장을 어렵게 만나서 6자회담 재개라는 성과를 끌어냈지만 회담은 여전히 교착상태다.

선거철이어서 북측과 어떤 합의를 해도 그 진정성을 의심받고, 남남 갈등만 키울 가능성이 높다. 벌써 ‘5·31지방선거에서 참패가 예상되는 여권(與圈)이 DJ의 방북을 이용해 국면 반전을 노린다’는 얘기들이 나온다. 열린우리당 사람들은 “DJ 방북이 호남표와 햇볕정책 지지 세력의 결집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내놓고 말한다. 정부도 DJ의 방북을 돕기에 열심인 모습이다. 이철 철도공사 사장은 “대통령 전용열차까지 내줄 수 있다”고 했다.

모두 파당적 이익에 매몰돼 숲을 못 보고 있다. 호남과 햇볕정책 지지자들이 뭉치면 그 대척점에 있는 사람들은 가만히 있겠는가. 왜 전직 대통령이 그 격렬한 대결과 갈등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려 하는가. ‘북풍 효과’의 약발도 사라진 지 오래다. 2000년 4·13총선 때도 선거 사흘 전에 남북 정상회담 개최 발표를 했지만 반(反) DJ 세력의 결집으로 오히려 손해를 보지 않았는가.

미국과의 FTA 협상 때문에도 4월 방북은 적절치 않다. 한미 양국은 3월 예비회의를 연 뒤 5월부터 본협상에 들어간다. 격렬한 반미시위도 예상된다. 지난해엔 반미운동의 인화점(引火點)이 ‘평택 미군기지 이전 반대’와 ‘맥아더 동상 철거’였지만 올해엔 FTA 반대운동으로 옮겨 왔다. 선거와 맞물려 그 파문이 간단치 않을 것이다. FTA 협상의 성공적 출발은 중요하다. 협상이 제 궤도에 오를 때까지 북과는 적당한 거리를 둬야한다. DJ가 평양보다는 서울에서 FTA 반대자들을 설득하는 것이 국익에 더 부합되는 이유다.

솔직히 말하면 반미시위를 충분히 예상했을 여권이 FTA 협상 시점을 5월로 잡은 것도 석연치 않다. 4월엔 DJ를 북에 보내 지지층을 결집하고, 5월엔 FTA 협상을 시작해 선거에서 보수층의 마음을 돌려 보겠다는 전략처럼 읽히기도 한다.

앞으로 FTA 협상의 성공적 타결을 통해 한미동맹의 추(錘)를 경제동맹 쪽으로 옮기고, 정치·군사동맹의 이완(弛緩)으로 생길 여유 공간을 이용해 남의 연합제와 북의 ‘낮은 단계 연방제’의 접목을 추진해 나갈 것이란 관측도 있다. 야당이 제기하는 ‘남북 정상회담의 정략적 이용 의혹’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어느 경우나 노무현 정권엔 일종의 실험이 될 것이다. 선거에서 어떻게든 이겨서 살아남자는 단순한 생존 차원인지 아니면 이번 기회에 한반도 안팎의 질서를 바꾸겠다는 소명(召命) 의식의 발로인지 알 수 없으나 전직 대통령이 꼭 그러한 실험의 일선에 서야 하는가. 서더라도 4, 5월은 피했으면 한다. 자칫하면 분신(分身)과도 같은 햇볕정책의 대의(大義)마저 훼손될 수 있다.

이재호 수석논설위원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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