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현실문제 해결 도구로 봐선 안돼"

  • 입력 2006년 2월 10일 03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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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전후사의 재인식’(약칭 재인식)의 출간은 좌에서 우로 수평 이동한 것이 아니다. 한국 현대사 연구의 수준을 질적으로 수직 상승시킨 것이라고 자부한다.”

‘재인식’을 기획한 박지향(朴枝香·53·서양사) 서울대 교수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약칭 해전사)의 편향성 극복을 기치로 내걸고 출간된 ‘재인식’의 의의를 이렇게 강조했다. 9일 서울대 연구실에서 만난 박 교수는 ‘재인식’을 기획한 경위부터 설명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한국 사회 정책결정권자들의 역사인식이 여전히 ‘해전사’에 머물고 있다면 올바른 정책 결정이 이뤄지지 못할 것이라는 걱정이었다. 다른 하나는 2004년 ‘해전사’ 출간 25주년을 맞아 1권이 초판 그대로 재출간된 것에 대한 우려였다. 현대사 연구의 불모상태였던 1979년 ‘해전사’가 처음 출간되기 시작한 것은 의미를 인정받아야 한다. 하지만 초판 당시의 낮은 학문 수준을 업그레이드하지 않은 채 그대로 책을 낸 것은 한국 사회의 지적인 지체 현상을 보여 준다고 생각했다.”

―‘해전사’를 언제 처음 접했나?

“유학 갔다가 1987년 귀국해 처음 봤는데 ‘이런 식으로 역사를 봐도 되는가’ 하고 충격을 받았다. ‘해전사’는 분단 극복과 민족 통일을 진리로 삼고 여기에 헌신하는 것만 옳고 다른 것은 반역으로 바라봤다. 나도 진보적이라고 자처해 마르크스주의 역사관을 지닌 에릭 홉스봄(영국 런던대 명예교수) 아래서 공부한 적이 있는데 홉스봄도 학문과 현실정치를 엄격하게 구분했다.”

그러나 박 교수는 ‘재인식’을 ‘우파의 해전사’로 보거나 정치적으로 해석하려는 시각에 대해 쐐기를 박았다.

“일부에서는 ‘재인식’에 이념적 색채를 입히려고 하는데 우리 편집위원들은 이에 단호히 반대한다. 우리가 이 책을 기획한 것은 역사를 역사로 보지 않고 현실문제 해결의 도구로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풍토를 바로잡자는 취지였기 때문이다.”

―‘재인식’의 정치적 파장을 우려해 기고를 꺼린 학자들도 많았다던데….

“기획단계에서 국사학자들과도 깊이 논의를 했지만 다들 못하겠다고 물러섰다. ‘우리만이 한국현대사를 다룰 수 있다’는 폐쇄성도 느껴졌다. 몇몇 젊은 학자들은 민족 통일을 지상과제로 하는 ‘해전사’의 역사관이 국사학계의 정통으로 자리 잡으면서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일종의 금기가 됐다고 토로했다. 국사학계에 일종의 ‘자기검열’이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해전사’의 필진도 이념적으로 다양한데 너무 한쪽으로 몰아 비판하는 것이 아니냐는 목소리가 있다.

“‘해전사’에 다양한 성향의 학자들이 참여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또 ‘해전사’가 일천했던 현대사 연구에 불을 붙인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분단 극복과 민족 통일만이 역사적 진리라고 선언한 논조가 이후 근현대사 연구에서 계속 확대 재생산될 뿐 그에 대한 문제 제기를 용납하지 않게 됐다는 점이다. 이런 분위기로 인해 해전사의 관점과 다른 실증적이고 수준 높은 연구 성과가 사장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을 문제 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재인식’은 ‘해전사’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승화이고 극복이다.”

―그렇다면 ‘재인식’이 생각하는 역사적 진리는 무엇인가.

“‘재인식’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해전사’의 역사인식이 놓치고 있는 다른 수많은 연구 성과를 보여 주려 할 뿐이다.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고 교훈을 얻기 위해서 과거의 잘잘못을 가려야 한다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 판단은 학자의 몫이 아니라 시민의 몫이다. 학자는 시민들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풍부한 사료를 제시하고 현실의 관점이 아니라 당대의 관점에서 당대인들의 사고와 행동을 설명해 줘야 한다. 이런 과정을 생략한 채 역사적으로 단죄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박 교수는 ‘재인식’의 편집위원들이 1950년대까지 다룬 ‘재인식’에 이어 1960년대를 재조명하기 위한 후속작업을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박지향 교수는

△1953년 서울생

△1975년 서울대 서양사학과 졸업

△1978년 서울대 대학원 서양사학과 석사

△1985년 미국 뉴욕주립대 대학원 박사(유럽사학 전공)

△1985∼87년 미국 뉴욕 프랫대 교수

△1987∼92년 인하대 문과대 교수

△1992∼현재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2003∼현재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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