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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턱시도 빌릴 돈 엄마가 벌려면…” 고교졸업파티 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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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턱시도 빌릴 돈 엄마가 벌려면…” 고교졸업파티 안가

입력 2006-02-09 03:03수정 2009-09-30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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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사진들 좀 보세요”
7일(현지 시간) 미국 조지아 주 애틀랜타 외곽의 맥도너 시 자택에서 만난 김영희 씨가 하인스 워드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여 주고 있다. 김 씨는 아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정직한 노력’을 통해 승리했다는 점을 가장 자랑스러워했다. 애틀랜타=김승련 특파원

가족 사진첩을 내 왔지만 어린 시절 아들과 찍은 사진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시간당 2.8달러를 받으며 오직 살기 위해 아등바등했던 어머니로서는 언감생심(焉敢生心) 꿈도 못 꿀 일이었을 것이다.

7일 오후(현지 시간) 미국 조지아 주 애틀랜타 외곽의 맥도너 시 자택에서 만난 김영희(59) 씨의 말에선 희미하게나마 그런 세월이 묻어났다. 아들 하인스 워드(피츠버그 스틸러스)가 북미프로미식축구리그(NFL) 제40회 슈퍼볼 MVP가 된 날에도, 아들이 구단 본거지인 피츠버그에서 승리를 축하하는 기념 퍼레이드에 나서던 날에도 그녀는 새벽부터 집 부근 고등학교 구내식당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었다.

오후 2시 반. 식당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그녀의 표정은 무덤덤해 보였다. 흥분한 건 오히려 기자였다.

1시간가량 얘기를 나눴지만 그녀는 “별거 없다. 잘 커줬으니까 좋은 거지”라는 식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좀 흐르자 그녀도 모자(母子)가 함께 헤쳐 온 30년 세월에 젖어들었다. 처음엔 사진 촬영을 할 때마다 “찍지 마세요. 뭐 한 게 있다고…”라며 연방 손사래를 쳤지만 나중엔 사진첩까지 꺼내 와 하나하나 설명했다.

엄마는 아들을 주니어(Junior)라고 불렀다. 아버지와 이름이 꼭 같은 아들을 부르는 말이다. 아들에게 엄마는 ‘마마(Mama)’였다.

그녀는 “주니어가 홀어머니 밑에서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지만 잘 울고 잘 웃는 아이로 커줬다. 고마운 일”이라고 했다.

언젠가 하루는 김 씨가 호텔 청소, 버거킹 근무 등 두세 가지나 되는 일을 마치고 귀가해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고교생이던 아들은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소리 없이 울었다.

포레스트 파크 고교 재학 당시 아들은 인기 만점의 학생이었다. 뛰어난 운동 실력, 잘생긴 외모, 여기에 우수한 학과 성적…. 여학생들의 관심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겐 졸업 파티의 추억이 없다. 턱시도를 빌려 입고, 리무진을 빌려 타는 게 관행처럼 돼 있는 행사였지만 졸업 파티를 위해 수백 달러를 쓸 수는 없었다. “그 돈이면 엄마가 몇 시간을 더 일해야 하는데….” 엄마는 아직도 그때 아들의 속 깊은 말이 귓전에 생생하다.

김 씨가 아들에게 ‘겸손하라(Be humble)’는 말을 강조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김 씨는 기자에게도 “인생엔 기복이 있기 마련이다. 좋을 때 기고만장하는 것은 절반만 보고 사는 것 아니냐”고 했다.

그녀는 아들에게 매를 든 적도 있다고 말했다. “없는 살림에 뭐가 자꾸 없어져요. 주니어가 자기보다 어려운 친구에게 준다며 다 들고 간 겁니다. 고교 졸업식 때 축구팀 코치가 ‘워드의 점심은 내가 다 샀다’고 합디다. 매주 20달러를 점심 값으로 줬지만 늘 다른 친구에게 줬다는 거예요. 요즘도 대학 친구 가운데 프로팀 진출에 실패한 친구에게 돈도 주고 차도 사 줍니다. 하지만 이게 능사는 아니잖아요. 정이 그리운 탓이겠지만 친구를 사귀는 방식 때문에 빗자루로 때려 준 적이 몇 번 있어요.”

김 씨가 지금 사는 곳은 아들이 사 준 두 번째 집이다. 처음 사 준 집은 너무 컸다. 그래서 방 2개인 지금 집으로 이사를 왔다. 이곳에서 그녀는 아들이 7년 전 집을 떠날 때 ‘어머니 외로우실까봐’ 사다 준 애견 ‘해피’와 둘이 산다. 3년 전 결혼한 아들 부부는 인근에 200만 달러짜리 저택을 구입했다. 홈구장인 피츠버그에도 집이 따로 있다. 며느리는 아들이 고교 때부터 사귀던 동급생. 손자(제이든)도 봤다.

집 내부는 한국식으로 꾸며져 있다. 동서남북(東西南北)을 한자로 쓴 액자도 보였고 1m 남짓한 장식장에는 처녀 총각, 나무꾼, 전통 혼례식을 테마로 한 한국의 전통 인형들이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다.

김 씨에게는 이미 알려진 대로 아픈, 아니 어려웠던 과거가 있다. 주한미군으로 복무하던 흑인 병사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도 낳은 것은 모두 가난 때문이다. 서울 토박이라는 그녀는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다. 그런 사정도 모르고 “학교 때 친구는 만나시느냐”고 물었지만 그녀는 “중고교를 못 다녔다. 한 끼 먹으면 다음 끼니를 걱정하던 시절이니까. 자랑거리도 아니지만 부끄럽게 생각해 본 적도 없다”고 말했다.

워드는 1976년에 서울에서 낳았다. 미국으로 온 것이 1977년. 미국 도착 1개월 만에 남편과 헤어졌다. 일부 보도처럼 남편의 독일 근무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는 “원래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헤어짐의 감정도 없었다”고 했다.

이혼과 동시에 법원에서 양육권을 잃었다는 말도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매달 200달러씩 받도록 돼 있었지만 남편은 일절 돈을 주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게 워드를 직접 키웠고 네 살이 되어서야 루이지애나에 사는 친할머니에게 보냈다.

김 씨는 “두세 가지 육체노동을 하면서 아들을 키우는 게 너무 힘겹고 벅찼다”고 했다. 물론 헤어져 있던 2, 3년 동안에도 몇 시간 거리에 있는 아들을 종종 만났다. 7세 때 모자는 재결합했다.

워드의 대학 시절 아버지가 학교 운동장에 나타났다. “나도 만났어요. 하지만 얼굴도 잘 기억하지 못하겠더라고.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까.” 아버지는 모자의 기억에서 지워진 지 오래됐다.

인터뷰를 위해 새벽에 애틀랜타행 비행기에 올랐지만 김 씨는 오후가 되도록 집을 비우고 있었다. 그녀는 집 부근에 있는 U 고교 식당으로 오전 6시 반에 출근해 오후 2시에 퇴근한다. 월 소득은 600달러(60만 원)쯤. 아들이 연간 60억 원을 넘게 버는 것을 생각하면 왜 그렇게 살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녀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주니어가 그만두라고 펄펄 뛰어요. 마마는 이젠 편하게 지내야 한다고. 하지만 놀면 뭐 합니까. 얼마 전에 2개월간 일을 중단한 적이 있어요. 그때 우울증에 걸렸어요. 공항에서 기내식 만들고, 버거킹에서 햄버거 굽고, 밤에는 청소하는 삶을 30년간 살았는데….”

아들은 어려서도 흑인보다는 한국이나 베트남 아이와 훨씬 더 가까웠다고 했다. 하루는 엄마한테 “내 이름을 한글로 써 달라. (한글은 못 쓰지만) 외우고 싶다”고 한 적이 있다. 아들은 이렇게 그림 그리듯 익힌 자기 이름을 팔죽지에 문신으로 새겼다.

“혼혈 흑인이라서 차별이 있었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김 씨는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끝내 답하지 않았다.

아들의 성공 이후 김 씨의 삶은 많이 바뀌었다. 좋은 집과 고급 승용차가 생겼다. “요즘도 아들이 내 옷을 사 와요. 좋은 옷들이죠. 나도 돈이 있지만 그런 옷을 도저히 살 수가 없답니다. 아들이 그런 내 마음을 알지요. 정말 고마운 일이죠. 하지만 난 잔소리를 해요. 그러면 아들은 ‘마마, 이젠 괜찮아요’라고 날 달랜답니다.”

애틀랜타=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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