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하준우]한국적 민주주의와 한국적 인권

  • 입력 2006년 2월 8일 03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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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늦가을 청와대 특보실에서 고등학교 국민윤리 교과서를 가지고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 (이 교과서에)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서구 철학자의 말을 인용하고 자유의 존귀성을 설명하는 글이 있었다. … 대학생들의 데모를 교과서가 선동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교과서연구’ 34호)

1970년대에 문교부(현 교육인적자원부) 도덕과 편수관을 지낸 안귀덕 씨의 증언이다. 그는 “유신이념(한국적 민주주의)과 새마을운동의 정신을 담아야 하는 것이 당위적인 과제였다”고 당시의 사정을 설명했다.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로 상징되는 ‘한국적 민주주의’는 많은 사람의 반발을 샀다. 당시 신민당 김영삼(金泳三) 의원은 ‘위장된 민주주의’ ‘빈사 상태를 헤매는 민주주의’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민주주의는 국가별 특징이 있을 순 있지만 보편적인 가치다. 사상, 종교, 언론, 집회·결사, 거주·이전의 자유뿐만이 아니라 재산권 참정권 등이 살아 숨쉬어야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적 민주주의에선 이 같은 보편성을 찾기 힘들다.

인권(人權)은 보편성이라는 측면에선 민주주의의 형님뻘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권리라는 인권의 근대적 개념이 형성된 것은 17, 18세기다. 민주주의 기원으로 여겨지는 그리스 시대 민주정은 기원전 4, 5세기의 일이다.

미국이 1789년 인권선언을 제정한 뒤 각국 헌법은 그 내용을 담았다. 인권을 한 국가의 헌법만으로는 지키기 힘들다는 인식이 퍼지자 유엔은 1948년 국제인권선언을, 1966년 법적 효력이 있는 국제인권규약을 채택했다. 비록 그 개념의 탄생은 늦었지만 인권은 국가의 한계를 뛰어넘는 보편적 가치로 자리 잡았다.

2001년 11월 발족한 한국의 국가인권위원회도 이런 보편적 가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인권위는 2002년 연간보고서에서 각국의 국내법상 기구인 국가인권기구의 모체는 국제인권법이며 활동의 기본 방향과 내용을 국제인권규범에서 찾을 수 있는 이중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 때문인지 인권위는 오지랖이 넓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지난달 발표된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P) 권고안도 장애인, 성적 소수자, 외국인 노동자 등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칠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인권위의 의결은 종종 논란을 불러일으키긴 하지만 보편적 가치의 증진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이런 인권위가 유독 몸을 사린다는 느낌을 주는 분야가 있다. 북한 인권 문제다. 인권위는 2004년 2월 인권NAP추진기획단을 구성해 권고안을 만들었다. 인권위는 이보다 앞선 2003년 4월 북한인권연구팀을 만들고도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다.

북한 인권 문제는 특수성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이는 현 정부의 논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권위는 정부가 아니다. 국가인권위법 해설집 발간위원회는 “인권위가 정부의 북한 인권 정책에 대해 권고 등의 형식으로 입장을 전달할 수 있다”고 했다. 인권위 내부에서는 ‘북한 인권에 침묵한다면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란 의견도 나오고 있다.

인권위가 특수성에 주목해 보편성을 경시한다면 ‘한국적 인권위’ 또는 ‘한국적 인권’이란 오명을 뒤집어쓰지 않을까 우려된다.

하준우 사회부 차장 ha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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