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건표]‘디자인 코리아’를 꿈꾸며

  • 입력 2006년 2월 7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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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학 입시철이 되면 절망적인 전화를 받는 일이 있었다.

“우리 애가 성적이 도저히 잘 나오지 않는데 어려서부터 미술에 소질이 있었거든, 디자인이라도 시켜야 할까 봐, 적당한 학교 좀 소개해 줘.”

아니, 디자인이 성적이 안 되는 학생들의 도피처라도 된다는 것인가? 이러한 편견은 디자이너는 제품의 궁극적 질을 책임지는 고도의 창조적 문제 해결자라기보다는 다 만들어진 제품의 모양을 예쁘게 덧씌우는 ‘표피적 후가공 처리자’ 정도로 보는 기술 중심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바야흐로 기술 중심의 하드 사회에서 인간, 감성 중심의 소프트 사회로 변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사회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의 ‘욕구계층론’적 관점으로 보자면 이제 먹고 입는 등의 1차적 욕구는 점차 당연시하고, 최고의 자아실현 욕구를 중시하는 사회로 변화함을 말한다. 디자인은 같은 물성적 성질을 지닌 제품이라 할지라도 소비자에게 자아실현 욕구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핵심 요소이다. 이제 사람들은 휴대전화를 보고 ‘소리가 잘 터진다’라기보다는 ‘귀엽다’, 심지어 ‘맛있다’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하고 있다.

요즘 전 세계를 사로잡고 있는 애플사의 ‘아이팟’의 성공 비결도 디자인에 있다. 사실 ‘MP Man’이라는 이름으로 세계 최초의 MP3를 생산한 나라는 한국이었다. 하지만 한국이 ‘얼마나 작고 가벼운가, 얼마나 많은 곡을 저장할 수 있는가’ 등 기술적 관점에 신경 쓰고 있을 때 애플사는 휴대용으로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큰 크기에, 흠집이 나기 쉬운 흰색 표면을 가진 ‘전혀 기술적이지 않은’ 제품을 내놓았다. 대신 불필요한 조형 요소를 최소화한 단순 디자인과 휠 터치 방식이라는 새로운 조작 방식을 선보임으로써 기술 중심에서 디자인 중심으로 게임의 법칙을 바꿨다.

동아일보가 월요 디자인 특집 섹션을 새로 선보인 것도 세상의 이 같은 변화 때문이리라. 집중적 기술 개발과 우리 국민 특유의 집단적 소비행태 덕분에 모바일 기기, 인터넷 등을 중심으로 우리나라는 이제 기술 강국이 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진정한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산학관의 국가적 역량을 모아 디자인에 대한 제대로 된 투자를 할 필요가 있다. 1950년대 초 국제통산성(MITI)을 중심으로 디자인을 산업 중흥의 핵심으로 보고 이에 대한 집중 투자를 한 일본이나, “디자인 아니면 그만두라(Design or Resign)”라는 영국 마거릿 대처 총리의 정책 등은 국가가 어떻게 디자인을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았는가를 잘 보여 주는 예다.

우리 정부는 3차에 걸친 산업디자인진흥종합계획 수립을 통하여 디자인에 대한 집중 투자를 하고 있고, 국내 최고의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도 세계적 디자인의 중심지인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디자인 전략회의를 주재하는 등 변화의 조짐은 크다. 하지만 이러한 상의하달 방식에는 한계가 있다. 진정한 디자인 강국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국민이 높은 ‘디자인 문화 수준’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저급한 디자인이 발붙일 수 없는 생활 속의 디자인 운동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에 일고 있는 시민 중심의 ‘공공의 디자인’ 운동은 매우 고무적이라고 볼 수 있다.

과거의 ‘메이드 인 USA’가 이제 ‘디자인드 바이 이탈리아’로 변하였다면, 앞으로 ‘디자인드 바이 코리아’도 안 될 것 없다. 나아가 우리나라 곳곳에 디자인적 고려가 녹아들고 사회 모든 분야가 디자인적 사고로 조직되고 운용되는 ‘코리아 바이 디자인’의 세상을 꿈꾼다면 지나친 욕심일까?

이건표 KAIST 산업디자인교수·세계디자인학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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