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리모델링]<4>애정의 재구성

  • 입력 2006년 2월 6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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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정전선 이상없다고요?

산부인과 의사인 이모(45·여) 씨. 결혼 16년째인 남편(46·의사)과 부딪칠 때마다 남편에게 이런 말을 하곤 한다. “당신 외국 가서 박사 학위 받은 사람 맞아?”

이 씨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일에선 똑 소리 나는 남편이 집안일이나 아내와의 관계에서는 ‘초딩(초등학생)’ 수준이기 때문이다.

“사랑보다는 정으로 산다는 것도 알죠. 그런데 갈수록 남편이 아이, 그것도 막내아들 수준으로 떨어지는데 도대체 남자라는 생각이 안 들어요.”

‘아내가 여자냐? 가족이지.’ 남편들이 흔히 하는 얘기지만 솔직히 아내도 마찬가지다. 부부가 오래 살면서 너무 익숙한 ‘가족’이 되다 보니 굳이 무슨 특별한 문제가 있지 않아도 애정은 퇴색되어 간다.

“보시기인 줄 알았던 남편이 갈수록 작아져 이제 종지가 됐다”고 쓴웃음을 짓는 이 씨는 남편에 대한 애정도 종지만큼이나 쪼그라들었다면서 가끔은 남편에게 이렇게 외치고 싶다고 했다. “나, 당신 엄마 아니거든!”

그림 선현경

오래 살을 맞대고 살아온 부부들의 애정전선, 겉보기에는 이상 없어도 이렇게 속으로 곪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랑으로 시작했지만 현실에 부대끼면서 어느덧 사랑은 식어 버리고 아들처럼 느끼든 동생처럼 느끼든 ‘친구’로 남으면 그나마 성공한 거지만 원수처럼, 혹은 남남처럼 되는 일도 흔하다.

프리랜서 편집디자이너인 유모(38·여·서울 마포구 서교동) 씨는 울산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남편과 1년에 서너 차례 얼굴을 보는 ‘분기 부부’다.

9년 전 명문대 출신이란 점에 끌려 남편과 결혼했지만 오랜 남편의 고시공부 뒷바라지에 지친 데다 남편이 고시를 포기하고 4년 전 울산의 한 회사에 취직한 뒤 자신은 서울, 남편은 울산에서 견우직녀처럼 살고 있다.

두어 달 전 모처럼 서울에 출장을 온 남편이 자신이 묵고 있던 호텔로 유 씨를 불렀지만 저녁 약속을 취소하면서까지 남편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유 씨는 밤늦게야 남편이 묵고 있던 호텔로 갔고 토라져 누운 남편의 뒷모습만 보다가 서먹하게 헤어졌다.

○ 부부의 ‘섹스코드’를 맞춰라

이처럼 생활 속에서 부닥치면서, 가족 간 갈등이나 경제문제 같은 외적인 문제로 인해 부부 사이가 소원해지기도 하지만 부부의 애정문제를 논할 때 성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TV 드라마에서 시집 안 간 처녀가 ‘너무 오래 굶었다’며 성에 대한 갈증을 토로하는 시대에 ‘국가공인 성 파트너’인 부부는 자유로운 미혼들과 달리 ‘코드’가 안 맞을 경우 매우 괴롭다.

남편은 대학교수, 자신은 유명학원 강사인 김모(42·서울 강남구 대치동) 씨는 친구와 수다를 떨 때면 결혼 초부터 잠자리를 피해 온 남편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으며 하소연한다.

“바람이 난 것도 아니고, 그나마 연중 행사였던 게 2년 전부터는 아예 없거든. 밤마다 내 허벅지를 송곳으로 찌르며 산다!”

같은 섹스리스 부부인데도 전업주부 박모(44·서울 강남구 역삼동) 씨는 정반대다. 올해로 결혼 17년째인 박 씨의 동갑내기 남편은 결혼 초부터 자신의 성적 능력이 떨어진다고 솔직하게 아내에게 고백했다. 박 씨도 성적 능력을 제외하면 나무랄 데 없이 헌신적인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있다.

유부남 유부녀의 외도가 일상적인 세태라지만 감정 표현에 서툰 대한민국 부부들은 성이란 여전히 말하기 부끄럽고 불편한 부분이다.

전문직 종사자인 이모(39·경기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 씨는 출산 후 성욕이 없어진 아내에 대한 불만으로 외도를 했다가 최근 이를 알게 된 아내와 불화를 겪었다.

이 씨는 결혼생활 10년 만에 처음으로 아내와 성에 대한 대화를 하던 중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아내가 성욕이 없었던 게 아니라 이 씨가 일방적으로 자신의 기분만 고려하고 아내를 여자로서 배려해 주지 않아 ‘신경질이 나서’ 잠자리를 하기 싫었다는 것이다.

○ 성(性)에 솔직하면 행복지수 높아져요

성문제를 비롯해 부부가 서로에 대한 불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도 못하고 살다 보니 대한민국 부부의 행복지수는 그리 높지 않다.

지난해 11월 행복가정재단이 기혼남녀 152명(남성 74명, 여성 7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행복부부지수는 30점 만점에 평균 19.75점으로 나타났다.

행복가정재단의 김병후 이사장은 “요즘 부부들은 외도 구타처럼 극단적인 문제가 아닌데도 불만이 쌓이고 애정이 식어 가는 특징이 있다”며 “아내는 ‘난 이렇게 살기 싫다’고 절규하는데 남편들은 ‘도대체 뭐가 문제냐’라는 식”이라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특히 우리나라 남성들은 어릴 때부터 점잖음을 강요당하고 즐기는 것 자체를 죄악시하면서 자랐다”며 “집 밖에서 즐거움을 찾을 것이 아니라 아내와 함께하는 생활의 즐거움을 누릴 줄 아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을 남성들이 먼저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경아 사외기자 kapark0508@hotmail.com

▼전문가 시각…부부 애정도 진화한다▼

겉보기에는 멀쩡한데 집에만 들어서면 냉랭한 부부가 많다. 사랑한다고 믿고 결혼하였는데 갈등이 생긴다. 상대방을 바꿔 보려고도 하지만 결국 포기하고 서로 거리를 두고 산다.

사랑으로 맺어진 부부인데 왜 갈등이 생길까? 이것은 다른 점이 많은 두 사람이 한 집에 살기 때문이다. 서로 똑같을 수는 없기 때문에 오해가 생기고, 오해가 갈등을 부르고 서운함이 증가하면서 사는 것이 재미없다. 인생에 좋은 시절은 다 가고, 의무만이 남은 것 같다.

서로 상대방의 탓을 하기에 바쁜 경우가 많지만 실은 누구의 탓도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와 배우자의 문제를 점검할 때 미리 염두에 두어야 할 전제조건이 있다.

첫째, 사랑의 로맨틱함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 뇌의 로맨틱한 화학 작용은 6개월 정도가 한계다. 그러나 사랑은 사라지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다만 진화할 뿐이다.

둘째, 내 선택이 그다지 잘못되지 않았다는 점을 믿어야 한다. 심리학에서는 ‘투사(projection)’에 의해 상대방을 선택한다고 한다. 어떤 동기에서 상대방을 선택하였든지, 현재의 배우자가 나에게 가장 맞는 사람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셋째,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해야 한다. 서로 다른 점은 상대방의 고유한 특성이지 잘못은 아니다. 다르다는 것이 서로를 나무라는 이유가 된다면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싸움이 끊이질 않을 것이다.

넷째, 상대방이 정말 원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적인 부분에서 부족해도 문제가 되지만, 원치 않는데 지나치다면 문제가 된다. 영화나 TV를 보기 싫어하는 부인에게 좋은 홈시어터 시스템으로 인정받으려 해도 문제가 된다.

부부간에 대화를 할 때는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이 있다.

불행하다거나 그다지 행복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감정의 원인은 자기 자신이다. 어떤 문제나 갈등이 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 그렇게 느끼겠지’라는 태도로 접근해야 한다. 그래야 문제가 제대로 보이게 된다.

점점 집안 분위기가 냉랭해질 때 서로 상대방을 탓하기 이전에 자신의 마음을 먼저 들여다보라. 그리고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한 다음 대화하라. 시댁이나 친정, 혹은 자녀나 친구 등은 부부관계에서 제3자일 뿐이다. 부부간에 어떤 갈등이 생겼을 때 이를 제3자에게 알리고 그들의 힘에 기대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당장은 효과가 있어 보이지만 부부 사이의 문제 해결능력을 약화시키고 문제가 반복될 여지를 남기게 될 것이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부부도 웨딩마치를 울리는 그 순간부터 성숙한 관계일 수는 없다. 서로 잘 맞지 않아도 노력하면 된다. 노력해도 안 되면 도움을 받으라. 도움을 받는 것도 용기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방수영 행복가정재단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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