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영균]경제부총리는 심부름 장관인가

  • 입력 2006년 2월 6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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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시장경제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외환위기에서 경제를 구해 낸 일등공신으로 꼽히는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는 이른바 386 정치인들을 이렇게 비판했다. 경제원리를 무시하는 발언으로 경제팀을 공격하는 정치인들을 겨냥했지만 속내는 현 정권의 실세를 염두에 두었다고 본다. 산전수전 다 겪은 경험 많고 노련한 그는 때로는 분명한 색깔을 감추지 않았다.

이헌재 씨의 사퇴로 뒤이은 한덕수 경제부총리는 전임자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었다. 전임자가 정권 실세들과 티격태격하다가 물러난 탓인지 스스로 몸을 낮추고 ‘색깔 없는 부총리가 되겠다’고 했다. 비록 과거에 비해 권한이 많이 줄었다고 하나 경제기획원과 재무부를 합친 재정경제부의 장관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부총리는 경제정책에 관한 분명한 소신과 방향을 가지고 경제부처를 이끌어 가야 할 자리가 아닌가. 왜 그랬을까.

그 뒤 한 부총리의 정책을 보면 그 뜻을 헤아릴 수 있다. 그는 스스로를 ‘변화를 지향하는 합리적인 시장주의자’라고 자부했지만 경제원리에 어긋나는 반시장적인 권력의 요구에 속수무책이었다. 경제장관으로서 가진 권한도 힘도 없어 어쩔 수 없었을지는 모르지만 분배와 형평의 코드 맞추기에 바빴다고 본다.

경제수장으로서 1년 동안 내놓은 것은 부동산 시장과의 싸움, 특히 서울 강남지역 아파트 가격을 잡는다는 명분으로 발표한 세금과 규제 정책이 거의 전부다. 그나마 ‘경제대통령’과 실세 총리, 그리고 정치권이 주문한 정책을 ‘심부름’ 생산한 게 대부분이다.

잠잠하던 부동산 가격이 한 부총리가 취임한 작년 초부터 오르기 시작했고, 그는 ‘건설업이 망하더라도 집값을 잡겠다’고 극언마저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건설업은 망가져서 서민들의 일자리만 사라지게 했을 뿐이고 집값은 오히려 폭등을 거듭했다. 투기꾼이 아닌 1주택자까지 세금을 더 내야 하는 고통을 감내하게 됐다.

부동산 정책 실패의 근본 원인은 경제원리를 무시한 반시장적 정책 방향에 있다. 1년 전 경기 성남시 판교 분양가가 오른다는 소문을 타고 아파트 가격이 폭등하자 내놓은 정책들을 보라. 강남과 그 인근의 중대형 아파트 공급이 모자라 가격이 폭등하고 있다는 것은 동네 아이들조차 다 아는 사실인데도 세금 공세로 수요만 억제하려는 정책을 고집하지 않았는가. 그 결과 아파트 값만 더 올려놓고 말았다.

세금을 올려도 아파트 값이 진정되지 않자 작년 6월 당-정-청이 대통령 주재로 부동산 대책회의를 연 적이 있다. 이때 나온 발표는 ‘부동산 정책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는 것이었다.

지난주 청와대에서 대통령 주재로 당-정-청이 모인 부동산 관련 회의에서 나온 결론도 1년 전과 다름없다. ‘재건축 관련 제도를 전면 재검토한다’는 것이다. ‘전면 재검토’는 충격요법은 될지언정 남발하면 국민의 신뢰를 저버리는 일이다.

연초부터 부동산 정책에 대한 평가 점수는 낙제점에 가까운 듯하다. 시장 반응이 그렇다. 증권시장에서의 반응도 차갑기는 마찬가지다. 부동산이건 증권이건 시장의 반응이 부정적인 이유는 정책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 지방선거를 앞두고 오락가락하는 정책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소주세율 인상, 맞벌이 가구 소득공제 축소, 재건축 승인권 환수 등을 둘러싸고 정부와 당과 청와대가 제각기 다른 소리를 내는 모습은 코미디에 가깝다. 이러고서는 신뢰를 얻기 어렵다.

청와대와 당 사이에서 정책이 흔들리는 와중에 국민경제는 멍들어 갈 뿐이다. 수요공급의 시장원리를 무시하는 정책, 조세원리에 어긋나는 조세정책에 대해 할 말을 하는 관료를 보기 어렵다. 경제부총리를 비롯한 경제 관료들이 제 역할을 했더라면 이렇게까지 엉망이 되지는 않았을 터이다.

박영균 편집국 부국장 parky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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