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임성호]정치 멍들게 하는 폭로 공방

  • 입력 2006년 2월 6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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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로란 말은 보통 부정적 뉘앙스를 지닌다. 그러나 관점과 상황에 따라선 폭로의 순기능이 부각될 수 있다. 단기에는 부정적일 수도 긍정적일 수도 있지만 폭로에 의존하는 정치가 이어질 때 장기적으로는 ‘제도 틀’이 와해되고 정치 신뢰감이 깨지며 국정운영이 어려워진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함이 있다.

한 여당 국회의원이 한미 간 외교와 안보에 관련된 기밀 문건을 폭로하며 현 정부의 외교정책 결정 과정에 문제를 제기했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관한 실무 차원의 한미 협상 내용이 대통령에게 제대로 보고되지 않았고 그 결과 정부의 외교정책에 혼선이 초래되었다는 내용이다.

만약 이 주장이 맞는다면 행정부의 중대한 잘못을 지적하고 이를 국민에게 알렸다는 점에서 공을 인정할 만하다. 행정부를 감시하고 국민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여론 형성을 돕고 옳은 정책을 유도한다는 의회의 교과서적 역할에 부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정부 측은 의원의 주장을 부인했다. 만약 청와대 대변인의 해명대로 대통령이 정말 한미 협상 초기부터 모든 과정을 알고 챙겼다면 이번 폭로는 부분적 정보를 잘못 해석한 한 의원의 경솔함을 보여 주는 것이거나 정책 방향을 둘러싼 여권 내부의 조정 실패와 내부 권력다툼을 시사하는 것일 수 있다. 후자의 경우 분파대결과 이념적 노선갈등에 따른 당-정-청의 불협화음과 정권의 무능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특히 심각한 우려를 자아낸다.

아직은 어느 주장이 옳은지 확실치 않다.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주장의 진위와 상관없이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외교라인의 기밀 문건이 적법한 절차 없이 유출되었고 그것을 여당 의원이 언론에 일방적으로 공표했다는 것이다. 설혹 폭로 내용이 사실일지라도 이러한 절차상의 하자는 그 정당성을 훼손시킨다.

한편으로 볼 때 국민의 대표자인 의원들도 민감한 외교안보 사안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 정책결정에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민주주의 체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러한 민주주의 원칙상의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의원이든, 행정부 관리든 그들이 접한 기밀문건을 적법하지 않게 누출할 때 초래될 수 있는 국정운영의 후유증을 간과해선 곤란하다.

폭로 정치가 이어질 때 행정부와 여야 의원들 간의 공적 의사소통 라인이 안정적으로 제도화될 수 있겠는가. 관련 공직자와 정치인들 사이에 신뢰감이 깨지며 정책결정을 더욱 배타적이고 비공식적 비공개적인 방식으로 하려 들 것이다. 그럴수록 더 큰 의심과 불신을 낳을 것이며 정책결정과정에서 소외된 측이 사안마다 유출과 폭로 전략에 계속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악순환’이 되풀이될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국정운영은 진창을 벗어날 수 없다.

정책결정의 제도 틀 내에서 신의를 지키고 협조·조정하는 것과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고 여론에 호소하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취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국익이 걸려 있는 민감한 외교안보의 경우엔 특히 그러하다. 균형 찾기가 어려운 만큼 ‘절차의 정당성’에 신경을 써야 한다.

절차가 무시된 폭로는 진위 공방과 상관없이 결국 정치와 국정운영에 근원적 멍을 들게 한다. 국회가 점차 정치적 위상을 높여 가며 외교안보 사안에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시대로 접어든 만큼 특히 여야 의원들이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물론 애당초 폭로 전술을 쓸 필요가 없도록 행정부 정책결정이 항상 투명하게 조정된다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임성호 경희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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