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춤추는 유령 사이로 고독이… ‘렉싱턴의 유령’

  • 입력 2006년 2월 4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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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렉싱턴의 유령/무라카미 하루키 지음·임홍빈 옮김/272쪽·9000원·문학사상사

“커다란 행성의 주위를 조용히, 그러나 저마다 흥미진진한 궤도를 그리며 돌고 있는 위성. 독자적인 중력과 풍력을 지닌 작은 우주이며, 거대한 중력권에 수용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무라카미 하루키(56)가 단편소설집 ‘렉싱턴의 유령’에 붙인 작품해설에 나오는 말이다. 장편소설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어 온 무라카미에게 단편소설은 바로 그 작은 위성 같은 게 아닐까.

이 책은 1997년 번역 출간됐다 절판된 작품집의 새로운 번역판이다. 작가 자신이 “장편소설이라고 하는 그릇에서는 발휘되기 어려운 개성이나 주장이 내포돼 있다고 생각한다”며 애정을 보인 작품집이다.

책에 실린 일곱 편의 단편은 무라카미 특유의 상상력이 번뜩인다. 대부분 비현실적인 이야기여서 몽상의 한 편린을 듣는 듯한데 막상 다 읽고 나면 칙칙하지 않으면서도, 왠지 모를 고독과 외로움으로 쓸쓸해진다.

표제작 ‘렉싱턴의 유령’이 그렇다. 집주인이 여행 간 사이 봐주던 저택에서 밤을 보낼 때 벽 너머 거실에 찾아온 유령들. 그것도 무서운 유령이 아니라 음악을 틀어 놓고 춤을 추며 두런두런대는 유령들이다. 무라카미가 말하려는 외로움은 주인공이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유령들의 소리를 들을 때의 섬뜩한 느낌과 다르지 않다. 인간이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두렵고 떨리는 고독의 감정을, 짧은 단편 속에서 저자는 매우 섬세하게 전달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자 고독의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몇 주씩 이어지는 깊은 잠으로 도피하는, 저택에 살던 이들의 사연이 가슴을 시리게 한다.

무라카미의 주인공은 장편에서도 그러하듯 다들 집착하지 않고, 구름처럼 흘러가듯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지난해 개봉한 같은 제목 영화의 원작인 ‘토니 다키타니’의 주인공 토니도 그렇다. 세상에 뿌리내리지 않고 살아가던 토니는 옷을 잘 입는 아름다운 여인에게 운명적으로 빠져들어 결혼한다. 그런데 아내는 지독한 옷 수집광이고….

이 밖에도 학창시절 급우들에게 따돌림 당한 남자가 전하는 독백을 통해 고독의 불가피함을 이야기해 주는 ‘침묵’에선 생의 한순간에 진실을 포착해 내는 단편의 특성을 맛볼 수 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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