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떠난 ‘공안 외길’ 고영주 前검사장 인터뷰

  • 입력 2006년 2월 3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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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말 검찰 내부통신망인 ‘e-프로스’에 한 검찰 간부가 작별 인사를 올렸다. “소신에 반해 행동하지 않고 비굴하지 않아도 27년간 검사를 할 수 있도록 해 준 검찰 조직에 감사합니다. 큰 허물 없이 떠날 수 있는 걸 축하해 주면 고맙겠습니다.” 글을 올린 사람은 고영주(高永宙·57·사법시험 18회) 서울남부지검장. 그는 27년의 긴 검사생활을 단 두 줄의 짧은 인사로 마감했다. 그는 1980, 90년대 격동기에 대검찰청과 서울지검 공안부에서 일하면서 검사생활의 대부분을 공안검사로 지냈지만 공안검사 중에서도 ‘온건하고 합리적’이라는 안팎의 평가를 받았다. 그는 검찰에 남은 ‘마지막 구(舊) 공안’으로 불리기도 했다. 1998년 김대중(金大中) 정부 출범으로 ‘신(新) 공안’이 등장하면서 몰락하기 시작한 ‘구 공안’은 이제 그의 사퇴로 완전히 퇴조한 셈. 그가 사퇴한 뒤에도 공안의 수난은 이어졌다. 그의 고교(경기고) 후배로 검찰 공안의 맥을 이어 온 황교안(黃敎安) 서울중앙지검 2차장이 2일 발표된 검사장 승진 인사에서 제외됐다.》

지난달 31일 퇴임한 그를 2일 만나 봤다. 그는 “공안사건은 개인의 이익이 아닌 국익을 침해하는 사건이어서 국민 개개인은 큰 관심이 없다”며 “그러나 공안이 일을 안 하면 나라는 겉으론 조용하지만 속으로 멍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작별 인사에서 못 하고 가슴에 묻어 뒀던 공안에 관한 ‘긴 이야기’를 했다.

―‘공안검사 수난시대’라고 한다. 평생 공안검사를 지낸 사람으로서 어떤 생각이 드나.

“1980년대 공안사건 수사 대상이었던 운동권 학생들이 나에게 ‘공산주의가 되면 당신이 심판받는다’라고 했다. 지금 공산주의 사회가 된 것도 아닌데 내가 심판을 받고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도 몰랐던 것 같다. 최근 몇 년에 걸쳐 사관(史觀)도 민중사관으로 바뀌고 교육도 민중교육이 이뤄지면서 사회가 다 바뀌는 것을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항간의 추측대로 ‘공안’이라는 것이 검사 인생의 족쇄로 작용했는가.

“김대중 정부 때 나는 ‘제거 대상 검사 10걸’ 가운데 1명이었다. 날 내보내려고 비리나 인권 침해 사례 등을 찾았는데 그런 게 없으니까 결국 좌천으로 끝났다.”

―사표를 낸 이유는….

“다 알지 않는가.”(그는 1일 발표된 검찰간부 인사를 앞두고 고검장 승진에서 제외될 것이라는 통보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동기 2명은 이전 인사에서 승진했고 이번에는 다른 동기 2명과 후배 1명이 승진했다.)

―공안 또는 공안검사가 뭐라고 생각하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지키는 건데, 한국의 공안검사는 국가 안보까지 책임지는 업무를 한다.”

그는 1983년 서울지검 검사로 부산지역 시국 사건인 ‘부림사건’ 수사에 참여했는데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당시 변호사로 부림사건 피고인의 변론을 맡았다. 노 대통령은 이 사건의 변호를 계기로 ‘인권변호사’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했다.

노 대통령과의 이런 인연이 ‘악연’이 되지는 않았을까.

―최근 몇 년간 검찰 인사에서 공안 출신 검사들이 홀대받는다는 지적이 많다.

“정권으로부터 인정받고 혜택을 받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정권의 보호까지 받아 가면서 하는 헌신이 무슨 가치가 있겠나.”

―왜 홀대받는다고 생각하나.

“공안검사들이 현 정부에서 푸대접받는 것은 한편으로 당연하기 때문에 왜 푸대접하느냐고 따지는 것 자체가 물정을 모르는 얘기다. 서로 이념이 다르다. 공안검사는 대한민국과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정통성이 있어 그걸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 운동권 출신은 그걸 부정하는 사람들이었다. 헌법은 그대로 있는데 그걸 운용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들로 바뀌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공안검사가 대접받기를 바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개구리를 뜨거운 물에 넣으면 뛰쳐나가지만 미지근한 물에 넣으면 자기가 익어 가는 줄도 모르고 죽어 간다는 이야기가 있다.”

―현 집권세력과 검찰은 서로 상대방이 자신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소통의 문제는 없나.

“소통의 문제가 아니다. 서로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다. 생각하는 체계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건 당연하다.”

―과거 공안검사들도 잘못이 많지 않은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구체적으로 지적해 달라. 그래야 해명할 기회가 있을 텐데 공안검사를 했다는 자체만으로 불이익을 받아야 한다는 건 이해하기 힘들다.”

그는 현 집권세력 중 일부가 과거의 공안검사가 민주화 방해 세력이었다고 주장하는 데 대해서도 반박했다.

“우리는 민주화 세력을 도와줬고 그게 그들이 집권하는 바탕이 됐다. 좌파 중에서도 극좌파가 있고 민주화운동 세력이 있었다. 우리는 극좌파가 활개를 치지 못하도록 했고 그것이 합리적인 민주화 세력이 집권하는 결과가 됐다.”

―후배 공안 검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예나 지금이나 공안검사는 힘들고 외로운 길이지만 공안검사는 그런 자리인 만큼 사명감을 갖고 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화학공학도였는데 어떻게 검사가 됐나.

“대학 3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군에 입대해 법 공부를 시작했다. 사법시험을 보면 휴가를 보내 준다고 해 휴가 가고 싶어서 사시 1차 시험을 장난스럽게 봤는데 합격했다. 고교 선배가 공부를 계속 해 보라고 해서 검사로 살게 됐다.”

―공안검사로서의 삶에 후회는 없나.

“스스로 선택한 길인 만큼 후회는 없다. 바깥에서는 공안검사를 정권과 결탁해서 호의호식하는 자리라고 하지만 외롭고 괴로운 자리다. 간첩한테서 얻어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으냐. 사명감 하나로 일했다.”

조용우 기자 woogija@donga.com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고영주 전 서울남부지검장 프로필▼

△1949년 2월 충남 보령 출생. 57세

△1971년 서울대 화학공학과 졸업

△1976년 사법시험 18회 합격

△1978년 청주지검 검사

△1983년 서울지검 검사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 수사 참여

―‘부림사건’ 수사

―전학련 삼민투 이적 단체로 기소

△1986년 대검 검찰연구관, 북한 형법 연구

△1995년 대검 공안부 공안기획관

―12·12, 5·18사건에 대해 내란죄 성립이 가능하다는 논리 제안

―검찰 최초로 한총련(5기)에 대해 이적 단체 규정

△2003년 청주지검 검사장

△2005년 서울남부지검 검사장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지도부 비리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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