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별세]대중 사로잡은 그만의 상상력과 해학

  • 입력 2006년 2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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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을 수식하는 언어는 사상가, 철학자, 정보학자, 비디오예술의 시조, 전위음악가, 퍼포먼스예술가 등 매우 다양하다. 틀린 말들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예술사적 업적을 좁혀서 표현한다면, 텔레비전과 비디오라는 전자매체의 예술적 가능성을 풍부한 상상력을 통하여 예술로 실천하는 데 그보다 더 큰 영향력과 파괴력을 행사한 예술가는 드물다는 표현이 사실에 접근할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1960년대라는 매우 특이한 유토피아의 시대, 즉 상상력을 앞세워 방황을 권장하고 문화의 향기를 위한 어떠한 행동도 시샘보다는 독창성으로 받아들이던 대중문화의 발흥기에서 나온 것이다. 백남준은 대중문화의 우상이자 대중 모두가 찬미하던 텔레비전을 공격하고 텔레비전의 권위를 거덜 내는 전시회를 기획함으로써 비디오예술의 창시자가 되었다. 1963년 독일 부퍼탈의 파라나스 화랑에서 열린 ‘음악의 전시, 전자텔레비전(Exposition of Music-Electronic Television)’이 그것이다. 대부분의 전위예술가가 그러하듯, 백남준도 상업주의의 거대한 표상이자 대중의 우상이던 텔레비전을 역으로 공격하는 제스처를 보여줌으로써 제도권적인 안일한 인식을 예술적으로 바꾸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가 텔레비전의 정보전달 기능을 옹호하는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기획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굳힌 것에 비교하면 매우 아이러니이다.

백남준의 예술철학은 대중과의 상호작용을 근간으로 삼는다. 즉, 대중적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재미와 우연, 기발한 착상 등 20세기 초 다다이즘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고, 때로는 재기 넘치는 해학을 의도적으로 선사함으로써 대중을 사로잡는다. 백남준에 대한 대중적 열광은 작품이 갖는 문맥의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표현이 주는 기발함과 재치, 그리고 해학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발상은 그가 전위예술그룹인 ‘플럭서스’에 몸담고 있던 독일무대에서 퍼포먼스로 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백남준은 1990년대 초 비디오예술을 비빔밥으로 정의하였다. 남은 반찬을 버리지 않고 이것저것 섞어서 밥에 비벼먹던 한국의 정서를 비디오예술에 비유하여 이른바 ‘미학적 혼합물(Aesthetic Melange)’로 표기한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비디오가 비디오예술이라는 단일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온갖 시각예술 장르에서 다양하게 쓰이고 있는 현상을 지적한 것이다. 이는 과거 단명하였던 현대미술의 특정 사조들에 비하여 단일 예술장르가 반세기 가까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오늘의 현실이 이를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다.

백남준을 비디오 예술의 아버지, 창시자 등 이른바 ‘비디오의 신’처럼 묘사하는 데 대한 저항이 한동안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적이 있다. 제2세대 비디오예술가들이 창시자인 백남준과의 차별성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자연스러운 논쟁이었다. 그러나 그가 뇌중풍으로 휠체어 신세를 지기 시작한 1996년 이후 백남준 예술에 대한 재조명 작업은 구겐하임미술관의 회고전을 시작으로 제 궤도에 올려졌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금 한국예술을 국제화시킨 최초의 인물이라는 영웅적 미사여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백남준에 대한 학문적 재조명 작업이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시도될 때가 왔다고 본다.

지관을 데리고 묏자리를 보는 오붓한 재미를 맛봐야겠다던 그의 문학적 수식은 사실이 되어버렸다. 예술은 상상력과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외치던 큰 별이 떨어졌다.

이용우 미술비평가 ‘백남준, 그 치열한 삶과 예술’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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