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관 임명 진보 개혁만이 다양성 아니다"

  • 입력 2005년 11월 30일 16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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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기원 전 대법관. 자료사진 동아일보
배기원 전 대법관. 자료사진 동아일보
“대법원의 구성이 서열에서 벗어나 다양화하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지만, 이것이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인사로만 구성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30일 정년퇴임한 배기원 전 대법관은 퇴임사에서 “최근 사회 일각에서 진보·개혁적 인물을 대법원에 대거 포진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이데올로기 대결시대가 종언을 고한 마당에 보수냐 진보냐의 잣대로 섣불리 법관들을 편 가르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며 최근의 대법관 인사에서 나타난 ‘진보화’ 경향을 우려했다.

그는 “단편적인 몇 개의 판결만으로 한 사람의 가치관이나 법철학을 쉽게 재단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며 “법관이 가장 우선해야할 가치기준은 진보냐 보수냐가 아니라 옳고 그름의 문제가 돼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대법관 임명에서 일부 정치인이나 시민단체가 진보·개혁적이라고 내세우는 몇몇 법관들이 업무수행능력이 뛰어나고 존경받는 여타 법관들보다 우선순위를 차지한다면, 묵묵히 일하는 대다수 법관들의 사기를 떨어뜨려 일할 의욕과 열의를 잃게 할 것”이라며 “이는 법관들로 하여금 사건의 실체에서 벗어나 진보적이고 개혁적이라고 불릴 만한 판결을 하려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게 해, 종국에는 사법권의 독립을 침해하고 사법부의 신뢰를 떨어뜨리게 될까 두렵다”고 걱정했다.

배 전 대법관은 또 “사법부에 대한 일반 국민의 불만과 불신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라며 사법부가 집권세력의 눈치를 보지 않을 때야 국민의 불만과 불신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정치권력의 노골적인 재판간섭이 사라졌지만, 사회지도층과 국회의원의 재판 등에서 다른 유사사건에 비해 현저히 균형을 잃은 것으로 비쳐질 때 국민들은 재판부가 집권세력의 눈치를 보거나 그에 영합한 결과라고 의심하게 된다”며 “이것이 사법부에 대한 불신의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국민들이 사건의 실체를 제대로 모르고 오해한다고 한탄하거나 언론의 보도가 부정확하다고 탓할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재판에서 한 점의 의혹도 없었는지 냉철하게 반성해야 한다”며 “법원이 부자의 돈지갑과 권력자의 칼 앞에서나, 가난한 사람의 한숨과 눈물 앞에서나, 똑같이 공평하다고 느낄 때 국민들은 사법부에 존경과 신뢰로 화답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배 전 대법관은 “지난 5년간 신이 아닌 인간이란 엄연한 한계를 지닌 저의 판단이 최종적인 법의 선언이라는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고뇌와 번민을 거듭했다. 저의 부족한 능력과 식견으로 과연 그 많은 사건을 한 점의 오류도 없이 처리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혹시 저의 잘못된 판단으로 피해를 입은 당사자가 있다면 이 자리를 빌려 머리 숙여 용서를 청한다”는 말로 퇴임사를 마쳤다.

조창현 동아닷컴 기자 cc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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