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공직자 인사청문회 시행 5년 허와 실

  • 입력 2005년 11월 28일 03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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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공직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 제도가 도입된 지 5년이 지났지만 청문회에서는 수박 겉핥기 식 질문과 본질과 무관한 ‘사생활 들추기’가 적지 않아 공직 적격 여부를 가리기 위한 제도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으로 타나났다.

▽직무 능력 검증 잣대가 없다=그동안 인사청문회에서 나온 직무 능력에 관한 직접적인 질문 비율은 8.6%에 그쳤다. 그 내용도 피상적이었다.

국무총리 후보자의 경우 “국정운영 방향에 대해 설명해 보라”, “대통령에게 직언할 수 있겠는가”, “경제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얘기 좀 해 보라”는 식이다. 대법원장 및 대법관, 헌법재판소장 및 헌재 재판관에 대해서도 “정치권력으로부터 사법부의 독립을 실천하겠느냐”는 막연한 질문과 원론적인 답변이 오가는 수준이었다.

직무 능력에 대한 정확한 검증 대신 정치현안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를 묻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정치인 출신인 이한동(李漢東) 국무총리후보자 청문회(2000년), 이해찬(李海瓚) 총리 후보자 청문회(2004년) 때는 정치 현안 질문이 집중됐다.

남북정상회담 직후 열린 이한동 후보자의 청문회에선 대북정책과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김종필(金鍾泌) 전 총리 간 DJP 공조 문제에 관한 질문이 31개(19%)나 나왔다. 이해찬 후보자에게는 이라크 파병과 한미 관계, 수도이전 문제 등에 관한 질문이 34개(34.3%)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정치적 견해를 공개적으로 언명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은 대법관과 헌재 재판관들에게도 청문회 실시 당시의 정치적 현안에 대한 견해를 묻는 비중이 높았다. 대법관들에 대한 622개의 질문 중 165개(26.5%)와 헌재 재판관들에 대한 315개의 질문 중 108개(34.3%)가 각각 정치현안에 관한 것이었다.

▽도덕성 검증은 여론에 좌우=청문회가 부동산 투기 의혹이나 사생활 문제 등 도덕성 검증 위주로 흐르는 경향도 강하게 나타났다. 하지만 이 역시 뚜렷한 위법 판정의 기준이 없어 청문회가 당시 여론이 ‘부적격 판정’의 자료가 되기도 하고 유야무야 넘어가기도 하는 양상을 보였다.

2002년 7월 인준 투표에서 낙마한 장상(張裳) 국무총리 후보자에게는 총질문 170개 중 위장전입과 부동산투기 의혹에 68개(40%)가 집중됐다. 같은 해 8월 인준 투표에서 부결됐던 장대환(張大煥) 총리 후보자 역시 청문회의 전체 질문 111개 가운데 부동산 투기 및 소득세 탈루 의혹 등에 51개(45.9%)가 쏟아졌다.

이들 외에도 부동산 투기 의혹이 지적된 후보자가 꽤 있었지만 질문이 그다지 집요하지 않았고, 표결에서도 별 문제 없이 넘어갔다. 2002년 모 후보자에 대한 청문회에서는 자택의 등기부등본과 건축물대장에 차고가 등재돼 있느냐 같은 사소한 문제로 한동안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청문특위 위원장을 지낸 한 의원은 “부동산 투기 문제는 솔직히 그게 적법인지 불법인지, 또는 그게 공직 수행에 부적격 요인이 되는지 판단할 기준이 전혀 없어 표결 때 의원들 각자가 여론이나 감정에 따라 찬반투표를 하는 식”이라고 토로했다.

▽감싸기, 황당 질문 난무=청문회가 신변잡기 질문, 정치적 입장에 따른 아부성 질문 등으로 희화화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2003년 2월 고건(高建) 총리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당시 민주당 A 의원은 “서울시장 재임 중에 경기 안양에 사시는 아버님을 찾을 때 집 앞에서 바로 가시지 않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차를 내려 걸어 올라가셔서 주변 사람들이 굉장히 효자라는 얘기를 하더라”고 감쌌다.

변호사 출신인 열린우리당 B 의원은 올해 9월 이용훈(李容勳) 대법원장 후보자에게 “후보자의 부친과 숙부가 일제 때 순사의 부당함을 보고 비분강개해 칼을 빼앗아 부러뜨렸다고 하는데…”라고 이 후보자를 치켜세웠다.

2002년 9월 열린 김석수(金碩洙) 총리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한나라당 C 의원은 “총리로 인준된다면 전국노래자랑에 나가서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고, 열린우리당 D 의원은 양승태(梁承泰) 대법관 후보자에게 “후배 여성인 김영란(金英蘭) 대법관이 추천됐을 때 기분이 어땠느냐. 사표 내고 싶지 않았느냐”라고 물었다.

2003년 자민련 E 의원은 모 후보자에게 “왜 이혼을 했느냐. 수신제가(修身齊家)도 못하는 사람이 공직을 맡는 것은 상당히 버거운 일이다”라고 사생활을 건드렸다.

청문회 도중에 “지금 질문해 봐야 어차피 TV 생중계도 안 되는데 그만 하고 나중에 다시 시작하자”, “왜 생중계 시간이 3시간밖에 안 되느냐”고 위원장에게 따지는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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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우 기자 woogija@donga.com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조인직 기자 cij1999@donga.com

▼인사청문회 美선▼

정무직 공직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 제도를 실시한 지 200년이 넘은 미국에는 효율적인 청문회 운영을 위한 다양한 제도가 있다.

2000년 8월 미국 상원은 공직후보자들을 효과적으로 검증하기 위해 연방회계감사원(GAO)에 의뢰해 직무능력을 검증하기 위한 공통 질문항목을 만들었다.

이에 따르면 청문특위 위원들이 △성과지향적인 의사결정 능력 △재무관리 능력 △정보기술관리 능력 △인력관리 능력 등 4개의 범주에 걸쳐 31개 항목의 질문을 공직후보자에게 제기할 것을 권장하는 내용이 있다.

직무능력 검증을 위한 ‘준거틀’로 불리는 이 질문 항목들은 고위 공직 임용대상자의 △업무수행 능력 △도덕적 권위 △국민의 대표로서의 정치 감각 △시대상황 변화와 사회집단 현상에 대한 판단 능력 등을 적극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내용들을 총망라하고 있다.

구체적인 질문 내용을 보면 ‘과거 관리했던 조직의 구성원들에게 성공적으로 비전을 제시했던 사례 및 조직의 목표를 공유했던 경험을 소개하시오’(2항), ‘조직의 구성원들이 어려운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어 당신의 개인적인 리더십이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구체적인 사례 2, 3가지를 설명하시오’(3항)라는 내용 등이 포함돼 있다.

또한 조직의 장으로서 인적자원의 효과적인 관리를 통해 최대의 성과를 얻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다양한 배경과 능력을 갖춘 조직원들이 능력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직장분위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방안을 설명하라’(31항)는 질문도 예시돼 있다.

미국에서 상원의 인준 대상은 △행정부의 장차관 등 고위 공직자 △연방 대법관을 비롯한 판사 △대사 등 외교관 △군인 소장급 이상을 포함해 전체 200만 개의 공직 가운데 1만6000여 자리가 해당된다.

이들은 FBI의 사전조사→대통령 면접→인준안 제출→여론 검증→상원 인사청문회 등 5단계의 철저한 검증절차를 거쳐 공직에 임명된다.

하태원 기자 taewon_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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