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名)과 실제(實)의 문제는 아주 오래된 논쟁이다. 고대 그리스 사람이라면 아마도 이 논쟁을 ‘수도란 무엇인가?’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논쟁의 대상에 대한 입장을 세우기 위해 발명한 방법이 네 가지의 질문이다. 첫째, 과연 수도라는 것이 존재하는가의 질문이다. 헌재는 이 문제에 대해 ‘관습헌법’으로 존재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둘째는 만약 존재한다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를 물었을 것이다. 청와대와 국회와 행정기관이 들어가는 것인지, 청와대와 국회만 있으면 되는 것인지, 이런 질문들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셋째는 수도가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다. 넷째는 따라서 정책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인지의 물음이다.
이런 과정에서 성취하고자 한 것은, 어디까지 동의하고 어디부터 논쟁을 벌여야 하는지의 기준을 찾는 것이었다. 수도가 존재하는가의 물음에 양측이 각기 다른 의견을 지닌다면, 그 둘 사이의 논쟁은 원점에서 맴돌 것이 불 보듯 뻔하다. 불행하게도 당초 우리나라의 수도 이전 논의는 이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정책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을 터인데, 각기 다른 수도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동양의 논리도 결코 이에 뒤지지 않았다. 고대 중국의 논리체계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순자는 공자의 정명론에 바탕을 둔 ‘명실론’을 폈다. 그는 지(知)와 지(智)를 구분하고, 전자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앎의 능력을 지칭하는 데 썼고, 후자는 사람이 안 것과 실제 대상이 들어맞았을 때 쓰는 용어로 의미를 부여했다. 그에 따르면 인식 대상을 구분하면서 생기는 것이 명(名)인데, 이는 약속이고, 따라서 다른 것이면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했다.
중국 조나라 사람으로 논리의 대가로 꼽히는 공손룡이 한 ‘흰말은 말이 아니다’라는 명제는 유명하다. 그의 논리는 이렇다. 말이라는 것은 모양을 가리키는 개념이고, 희다는 것은 빛깔을 가리키므로 흰말은 말이 아니고, 말에는 흰 말, 검은 말, 누런 말이 있는데, 흰말이라면 나머지 색의 말들을 포함시키지 않으므로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순자는 이에 대해 흰말은 말 속에 포함되는 것인데 명칭만 갖고 사실을 혼란시키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동양과 서양의 인식의 차이에 주목한 미국의 리처드 니스벳 교수는 ‘생각의 지도’라는 흥미로운 책에서 이런 지적을 했다. 서양의 아이들은 동사보다 명사를 먼저 배우지만, 동양의 아이들은 상대적으로 동사를 먼저 배운다. 중국인들은 차를 권할 때 “더 마실래(再喝点인?)”라고 하지만 서양 사람들은 “차 더 할래(More tea?)”라고 묻는다. 동양인은 맥락과 행동을 중시하므로 명사를 굳이 표현할 필요가 없지만, 서양인은 마시는 것이 무엇인지가 더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또 서양인들은 사물의 범주화에 관심이 많아 각종 관사(a, the) 가 발달했지만, 동양인들은 명칭보다는 속성에 관심이 많아 명칭 따위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름을 바꾸고, 내용을 조금 손본 특별법에 여야가 합의하고 헌재가 인정했다. 니스벳의 통찰대로라면 아마도 내용이 많이 바뀐 모양이다. 아니면 흰말이 말이 아니듯, 신행정도시건설이라는 이름 붙이기의 위력일지도 모른다. 행정중심복합도시와 수도는 무엇이 다른지, 새로 건설되는 도시의 이름과 내용이 얼마나 명실상부(名實相符)할지는 시간이 두고두고 답해 줄 것이다.
박성희 이화여대 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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