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54년 伊물리학자 페르미 사망

  • 입력 2005년 11월 28일 03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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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기자회견에서 황우석(黃禹錫) 서울대 교수는 “과학과 윤리는 문명을 이끄는 두 수레바퀴이지만 현실에서는 앞서 가는 과학을 윤리가 따라잡지 못하는 사례가 많다”고 했다.

이는 1954년 11월 28일 세상을 뜬 ‘핵물리학의 아버지’ 엔리코 페르미도 피해 가지 못했던 문제였다.

이탈리아 물리학자인 페르미는 인류에게 엄청난 에너지원을 가져다 준 ‘현대판 프로메테우스’다. 그가 없었더라면 원자폭탄도, 오늘날의 원자력도 없었을 것이다.

페르미는 중성자를 이용해 새로운 방사성 원소를 만들어 낸 공로로 1938년 노벨 물리학상을 탔다. 1943년에는 세계 최초로 원자로를 이용해 통제된 핵분열 연쇄반응 실험을 성공시켰다. 이 실험은 원자폭탄의 제조, 일본에 대한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로 이어졌다.

페르미는 전쟁 종식을 위한 원자폭탄 사용에는 찬성했지만 자신의 연구 결과가 숱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무기로 쓰인 데 대해 괴로워했다. 전쟁이 끝난 뒤 수소폭탄의 개발에는 “사악한 짓”이라며 반대했다고 한다.

그는 이론과 실험 모두에 강한 ‘완벽한 물리학자’였다. 이탈리아가 ‘물리학 강국’이 되기를 꿈꾸었지만 무솔리니 정권이 집권하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고 만다. 아내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에 가자마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적성(敵性) 외국인’이 되어버린 그는 자신이 꿈꾸던 ‘자유로운 연구’ 대신 미국의 핵폭탄 개발 계획에 참여한다.

원자폭탄이 투하된 뒤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논란이 벌어질 때 정치를 극도로 싫어했던 페르미는 뚜렷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지만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모든 것을 따져 보라. 그러나 원하기만 하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함으로써 자신을 속이지 말라.’

지금도 우주를 떠도는 중성자 양성자 전자 등은 그의 이름을 따 ‘페르미온’이라 불린다. 그는 천생 과학자였다. 말년에 암 투병을 할 때도 물리학 실험을 하는 것처럼 정맥 주사액의 방울 수를 세고 스톱워치로 시간을 재서 공급량을 측정했다.

‘오직 사실’로만 구성된 과학을 사랑한 반면 말을 꾸며 내야 하는 작문은 젬병이었다던 사람답게 그의 묘비명도 간결하기 이를 데 없다.

‘엔리코 페르미. 물리학자. 1901∼1954.’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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